매일신문

[세계의 창] 아랍 IBM

이진숙 전 대전 MBC 대표이사

이진숙 전 대전 MBC 대표이사
이진숙 전 대전 MBC 대표이사

1990년대 초, 필자가 중동 취재를 하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말 가운데 하나는 아랍 IBM이란 말이었다. 아랍 IBM은 '인샬라, 부크라, 말리시'라는 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바라건대, 내일 될 테니, 걱정 말라'쯤 되겠다. '인샬라'(Inshallah)는 '신의 뜻대로'라는 뜻이다. 척박한 사막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 세워 놓은 집이 내일 모래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환경에서 '인샬라'라는 말은 저절로 튀어나왔다. '부크라'(Bukra)라는 말은 당시 아랍 사람들의 태평함을 비꼰 말이었다. '내일'이라는 뜻을 가진 '부크라'라는 말에는 지금 못 하면 이따가 하면 되고 오늘 못 하면 내일 하면 되지, 뭐 그렇게 조급하게 구느냐는 뜻이 담겨 있다. '빨리빨리'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 사람들은 중동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 '부크라'라는 말을 들으면 문화 차이를 넘어 속이 터질 것 같았다고 했다. '말리시'(Malish)라는 말은 '괜찮아' 또는 '걱정 마'라는 뜻의 말이다. 계약이 늦어져서 발을 동동 굴려도 "말리시", 방송 시간이 다 되어서 급한데도 영상 검열관(전쟁 때는 영상을 검열하는 공보부 직원도 있었다)은 아랑곳 없이 "말리시"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인샬라, 부크라, 말리시의 영어 두음을 합쳐 만든 아랍 IBM은 아랍인의 특성을 요약한 표현이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곳이 관청, 공무원한테서였다.

20세기 마지막 전쟁이라 불리는 걸프전(1991)과 21세기 최초의 전쟁인 이라크전(2003)을 현장에서 취재한 필자에게 현장 취재만큼 힘들었던 것은 공무원들과의 전쟁이었다. 이라크로 입국하는 것도 힘들지만 요르단에서 출국하는 것도 긴 여정이었다. 혹시라도 위험 물질이나 테러 조직원이 이라크로 입국할까 봐 이를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사람을 붙잡아 두는 경우도 많았다. 이 과정을 통과하고 국경을 넘으면 더 길고 지루한 이라크 입국 사무소에서의 절차가 시작된다. 가방은 다시 풀어 헤쳐지고 심문에 가까운 질문이 이어진다. 질문을 끝낸 다음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한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담당자에게 언제 되냐고 물어도, "인샬라, 곧 되겠지"라는 말뿐이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입국 승인이 떨어지지 않아 관리에게 재촉을 하면 나오는 소리는 "말리시", 걱정 말라는 소리다.

오죽하면 아랍 IBM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관공서에 가서 업무 관련 허가라도 받으려고 하면 받아야 할 스탬프(도장)는 왜 그리 많고 거쳐야 할 부서는 또 왜 그리 많은지…. 되냐 안 되냐라고 물어보면 "인샬라"라고 답하고, 몇 시간을 기다리며 담당 공무원에게 애원에 가까운 요청을 하면 "부크라 부크라"라고 반복한다. 오늘 안 되면 사업에 지장이 생긴다고 해도, "인샬라, 부크라, 말리시"는 계속된다. 이 단계에서 '약'이 등장하기도 한다. 뇌물, 뒷돈을 주면 안 되던 일이 금세 해결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후진국일수록 관공서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다고 한다. 선진국은 되는 일은 금방 허가, 승인해 주고 안 되는 일은 무엇 때문에 안 되는지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최근 사업을 하는 주변 지인들로부터 아랍 IBM과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문제가 있는 사안을 과장에게 이야기하면 자기 소관이 아니니 국장에게 얘기하라고 하고, 국장에게 가면 자기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기관장이 결정할 문제라고 한단다. 모든 문제를 기관장이 결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조직의 총체적인 문제다. 담당 관리가 책임지기 싫어서 결정을 미룬다면 그것도 문제이고, 담당 관리에게 결정 권한을 위임해 주지 않고 기관장이 결정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다. 공무원의 수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공무원 제도가 복지의 형태로 유지된다면 그들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하는 대시민 봉사는 더욱 지체될 수밖에 없다. 찍어야 할 도장은 많아지고, 거쳐야 할 부서는 늘어나고, 그 와중에 결정할 사람이 기관장 한 사람이라면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 국민의 몫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은 공무원의 수준에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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