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엄마의 무게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현준이는 종손이었다. 경직 때문에 절뚝거리며 걸었지만 어머니의 정성 때문인지 경과는 좋았다. 현준이 어머님은 솜씨도 좋으셔서 직접 지은 커플룩으로 현준이와 나타나곤 했다.

한번은 일하느라 점심을 거르는 내가 안쓰럽다고 제사음식이라며 수줍게 반찬통을 건네셨다. 세상에, 난 파전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그날 처음 알았다. 김영란법 시행 전 이야기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현준이의 할머니가 어머님과 같이 외래에 오셨다. 경직이 심해져 주사시술에 대한 설명을 드리는데 할머니께서 "그거 꼭 해야 되나? 며느리가 돈이라도 벌어오면 몰라. 하는 것도 없이. 내 아들만 죽어나지"라고 말씀하셨다.

뒤이은 말은 더 놀라웠다. "교수님같은 며느리면 얼마나 좋겠어요, 한달에 몇 백씩 딱딱 벌어올 텐데." 현준이 어머님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고, 할머님은 오히려 당당하셨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 외람되지만 제가 정말 많은 어머니들을 만나는데요, 어머님덕에 현준이 이만큼 좋아진 거예요. 다 이렇게 좋아지는 건 아니거든요."

내가 현준이 어머니를 변호한다고 했지만 이미 결론은 나 있던 건지 현준이 치료를 중단한다는 연락이 왔었다.

그러다 지난주, 현준이가 7년만에 장애진단을 받으러 병원에 왔다. 처음 보는 보호자와 함께였다. 현준이는 딱 보기에도 똘똘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모든 게 어눌하고, 자신없어 보였다. 경미했던 경직은 심해져서 팔까지 틀어져 있었다.

현준이 부모님은 6년전에 이혼했고 현준이는 친척들이 돌아가며 돌본다고 했다. 나는 너무 안타까웠다. 물론 그새에 심해졌을 수도 있지만 7년전의 현준이는 아주 경미한 환자였다. 현준이 부모님이 왜 이혼한 지 모르겠지만 며느리가 하는 거 없이 돈도 못 벌어온다고 타박하던 현준이 할머님 생각이 났다. 결과적으로 현준이 어머님의 자리는 얼마나 큰 것이었나.

경미 어머님은 경미를 공주라고 불렀다. 염색체 이상이 있는 경미는 얼굴 생김새가 좀 특이했지만 경미어머님에겐 경미공주였다. 소풍날이면 같은 반 친구들과 선생님 도시락을 다 싸서 보낸다고 하셨다. 인지장애가 있는 경미를 차별없이 잘 대해주는 데 대한 감사라고 했다. 경미와 경미오빠에게 쏟는 정성은 같은 엄마로서도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경미아버지가 오셨다, 경미 어머니가 급사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몇 주 후, 근처의 재활원 선생님이 경미를 데리고 오셨다. 외지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경미를 재활원에 맡긴 거였다. 그렇게 경미공주가 나와 인연을 맺은지도 17년이 됐다. 엄마를 닮아 경미도 벌써 고혈압 치료중이다. 이젠 내가 한번씩 '경미공주~'라고 불러도 엄마를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씩 웃기만 한다.

엄마의 무게는 가늠이 안되는 것 같다. 특히 내 환자들처럼 아픈 아이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다. 나도 엄마이지만 내 환자 보호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나는 저 상황에서 저렇게 의연할 수 있을까. 하늘이, 세상이 원망스럽진 않을까. 저렇게 오랜 세월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돌볼 수 있을까. 내 환자 어머니들은 나한테 의지한다고 하지만, 사실 내가 어머니들께 기대어 의사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의 어머니들께 존경과 감사를,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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