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언미의 찬란한 예술의 기억] 무영당, 나눔과 공유의 정신을 기억하다

신축직전의 무영당(1936)
신축직전의 무영당(1936)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대백'과 '중파' 앞에서 만나던 사람들은 이제 어디서 약속을 할까. '대백'(대구백화점의 줄임말)이 지난달 말 영업을 종료하면서 대구 시민들은 이제 대백을 추억 속에 남기게 됐다. 이곳은 오래전 옛 건물이 사라진 '한일극장'과 2018년 약령시 부근으로 이전한 '중파'(중앙파출소의 줄임말)와 함께 '시내'를 찾던 사람들의 주요 약속 장소였다.

문화예술계에서 '대백'은 1971년 5월부터 대구백화점 화랑을 운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개관 기념으로 향토작가 13인 초대전을 여는 등 향토 미술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랑받았다. 1993년 대백프라자 개점과 동시에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이름도 대백프라자갤러리로 바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곳은 전문 큐레이터를 두고 일관된 기획의 향토 미술사 연구와 기획 전시를 이어오고 있어 더 뜻 깊다. 지난 5월에는 개관 50주년 기념전을 열었다.

지금은 운영주체가 대기업으로 바뀐 지역의 또 다른 백화점은 1980년대부터 소극장을 운영하면서 청년 예술가들에게 소극장 운동의 장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이렇듯 향토 기업인이 운영한 지역 백화점은 소비의 최첨단을 걷는 화려한 상업공간임에도, 공간을 할애해 문화시설을 운영하며 직‧간접적으로 지역 예술인들을 후원하는 역할을 빼놓지 않았다.

무영당백화점(1938)
무영당백화점(1938)

여기 또 하나의 백화점이 있었다. 1937년 서문로에 5층 흰색 타일 건물로 세워진 무영당(茂英堂) 백화점이 바로 그곳이다. 현재의 중부경찰서에서 서성로로 이어지는 서문로는 일제강점기 때 본정(本町)으로 불릴 만큼 정치경제 중심지였다. 무영당 창립자인 이근무는 개성상인으로 서성로변에서 33㎡(10평)도 안 되는 문구점(서점)으로 시작해, 일본인이 세운 이비시야 백화점, 미나카이 못지않은 백화점으로 키웠다.

매일신보 1937년 9월 22일자 기사를 찾아보면 무영당의 규모와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무영당(茂英堂)은 五층연와의 당당한 건물로서 부내원정(元町)에 잇는 三중정과 대립하야 일용백화의 진렬이며 식당 휴게장 전망대 등 설비가 완비하야 선진도시의 백화점에 조금도 손색이 업다한다. 이 백화점의 경영주인 리근무(李根茂) 씨는 당년 三十세 가량 되는 청년으로 식견이 풍부하고 의지가 견고한 장내의 촉망이 만흔 실업가라한다. 지난 十五일부터 개업하엿는데 요사히 매일평균 五천명가량의 고객출입이 잇서 매우 성황을 일우고 잇다한다.'

무영당이 자본력이 좋은 일본 백화점에 맞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사람이 만든 곳이라는 동질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백화점 2층에 전시장을 만들어 전시회나 발표회 등을 자주 열었다. 이곳은 조선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의 약속장소이자, 청년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었다. 이근무는 1920년대부터 일제가 금서(禁書)로 지정한 좌익 서적이나 러시아 소설 등을 구해주는 등 당대 지식인들과 청년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줬다. 자연스럽게 그가 운영하는 백화점의 문화공간은 청년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무영당에서 촬영한 중중떼떼중 출판기념 사진(이근무 박태준 윤복진)
무영당에서 촬영한 중중떼떼중 출판기념 사진(이근무 박태준 윤복진)

시인 이상화와 백기만, 화가 이인성, 아동문학가 윤복진, 작곡가 박태준 등 일제강점기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곳에서 교류했다. 윤복진과 박태준이 이근무와 함께 동요곡집 『중중떼떼중』 출판을 기념해 무영당에서 찍은 사진이 현재 남아 있다. 1920년대 대구를 증언하는 소설 『다각애』(이상수 작)도 이곳에서 출판됐다.

안타깝게도 이근무는 일제 말기 창씨개명을 하고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대구상공회의소 회원이 돼 근무하는 등 행보가 뒤집혔기에, 해방 이후 무영당도 문을 닫고 지역민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졌다.

무영당에 최근 다시 온기가 불어넣어지고 있다. 지난해 대구시가 철거직전에 있던 이 건물을 매입했고, 올해 도시공사와 함께 도시재생 공모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무영당의 역사적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활력이 넘치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모집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 경제를 일군 기업가의 정신, 그리고 그 공간을 예술인들에게 내준 나눔과 공유의 정신을 이을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가 모여서, 이근무가 '무영(茂英)'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처럼 다시 '무성하게 번창'할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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