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고구려 개국 이야기가 나온다. 주몽이 "소서노(召西奴)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는데,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였다는 기록이다. 『삼국사기』는 또 소서노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의 입을 통해 "어머니가 가산을 기울여 나라의 창업을 도왔다. 그 공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며 소서노가 고구려 건국의 큰 재정 후원자였음을 밝혔다.
나라을 일으키고 기업을 세우는 데는 돈이 든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는 더 많이 필요하다. 국권 회복과 독립전쟁에 나선 애국지사들로서는 인재 양성와 군사를 기르는 무관학교 운영, 무기 구입, 독립기지 건설 등에 군자금은 피와 같았다. 하지만 뒷날 돌려받을 길조차 없으니 누가 기꺼이 낼까.
◆김용환 독립운동가 집안 재산 팔아
이완용처럼 친일로 부를 쌓고 하사금으로 대대로 영화를 누린 군상(群像)이 즐비했고, 3대(代)가 망하는 독립운동이었지만 약 35년간 일제 치하에서 다른 삶을 산 사람들도 많았던 한국이었다. 가산을 팔아 군자금으로 내놓고 국권회복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애국지사가 숱했기에 오늘날 우리는 꿈에 그리던 '선진국 진입'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 삶 속에 '파락호'(破落戶)의 사람도 있었다. 말뜻처럼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으로 살았던 사람 말이다. 경북 안동의 독립운동가 김용환(金龍煥)이다. 그는 약 130,000평의 전답을 탕진한 인물로 묻힐 뻔했다. 탕진한 돈이 300억원쯤이라는 말도 있다. 그는 이를 군자금으로 보내려 어쩔 수 없이 노름과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는 척했다.
1887년 태어나 1946년 죽기 전, 유산을 모두 독립군자금으로 댔다. 외동딸(김후웅)의 시댁에서 혼수로 장롱을 사오라고 준 돈조차 노름으로 날렸다. 딸은 울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갖고 간 가슴 저린 사연이 나온 까닭이다. 스스로 의병 투쟁에다 독립군 후원 조직인 의용단에서도 활동했지만 딸에게는 끝까지 비밀로 했다.
정부가 1995년 뒤늦게 독립운동가로 서훈하자 딸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파락호'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학봉 김성일 후손으로 그가 끝내 독립운동 사실을 숨기고 남긴 한마디는 "선비 후손으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원망했던 '파락호' 아버지의 '묻힌 삶'을 뒤늦게 안 딸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이상룡선생 전답·99칸 종택까지 처분
경북 안동 출신으로 1925년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李相龍)도 토지가 상당한 법흥동의 고성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1908년 의병을 위해 1만민금(萬緡金)을 지원했고, 1910년 가족과 함께 만주 망명에 나섰다. 54세에 망명해 75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독립전쟁 군자금 마련을 위해 물려받은 엄청난 전답과 99칸 종택까지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상룡처럼 1911년 만주로 망명한 서울의 큰부자 집안 이회영(李會榮) 6형제(이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도 재산을 처분했는데, 당시 소 1,300마리 즉 400,000여원(600억원) 넘는 가치라는 추정도 있다. 6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광복 후 부통령을 지냈던 이시영을 뺀 5명은 옥사 등으로 삶을 마쳤지만 그 행적은 오늘도 빛나고 있다.
(대한)광복회 박상진(朴尙鎭) 총사령도 재산을 내놓았다. 아버지(박시규)가 아들에게 쓴 피맺힌 제문을 통해 박상진이 논 500두락(斗落·오늘날 마지기)과 밭 400두락의 부동산을 가족과 상의도 없이 일본 미쓰이(三井)회사에 30,000원에 저당을 잡힌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결국 땅을 되찾지 못하고 남은 가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으니 이를 어찌 잊을까.
(대한)광복회 만주지부장인 김좌진(金佐鎭)도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집안의 30여명 종(奴婢)부터 해방시키고 사재로 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폈다. 스스로 상투를 잘라 단발에 앞장섰다. 헌납한 엄청난 군자금에다 1910년 12월부터 1911년 2월까지 서울에서 군자금 마련 활동에 나서 체포돼 옥살이도 했고, 만주로 넘어가서는 청산리대첩 등으로 독립운동사에 길이 새길 족적을 남겼다.
◆머슴살이로 모은 돈 지원한 최재형봉오통전투에 참전한 함북 온성 출신 최진동(崔振東) 형제도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에서 일군 재산에서 50,000원의 큰 군자금을 내놓았다. 또 고향 함북 경원을 떠나 러시아 연해주 등지에서 머슴살이와 상업 등으로 모은 큰 돈을 독립운동에 쏟은 인물로 최재형(崔在亨)이 있다. 특히 그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할 때 지원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대한)광복회 지휘장 권영만(權寧萬)도 군자금 70,000원을 내놓았고, 충청도지부 회원인 장두환(張斗煥) 역시 권총 구입비로 2,000원을 의연(600석쯤 제공했다는 자료도 있다)했다. 광복회 평안도지부장 조현균
(趙賢均)은 무일푼에서 부자가 되어 일제 때 교과서에도 소개된 아버지
(조광호)가 물려준 평북 정주군 일대 만석꾼 제1부자의 큰 재산을 군자금으로 헌납했다는 연구도 있다.
군자금 의연에는 숱한 민간인도 동참했다. 박상진 증손(박중훈)의 광복회 자료를 보면 전라도 부호 박태규는 200,000원, 개성부호 김영배는 100,000원, 경북 의성군 산운리 이태대는 20,000원과 토지 700여 두락 이전을 약속한 사례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넘치는 친일(親日)의 매국노 물결 속에서도 군자금을 의연한 자랑스런 한국인이 있었고, 그들 일부라도 여기에 이름을 적어 기린다.
한편 (대한)광복회 지휘장 우재룡 맏아들로, 대구에서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를 맡은 우대현 상임대표는 2020년 4월 대구독립운동기념관건립을 위해 필공산 자락 사유지 47,520㎡(14,400평)를 내놓아 화제가 됐다. 아버지가 간부였던 광복회가 '자자손손 국권 회복에 나설 것'을 맹세한 뜻을 지키기 위한 마음에서 기부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100년 전 맹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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