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으로 생활하면서 어려운 일 중 하나는 촌지와 선물에 대한 대응이다. 기자 초년 시절에도, 선임이 된 뒤에도 이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는 건 마찬가지이다. 무조건 콩나물 대가리 하나부터 안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세상살이가 그렇지 않은 건 모두가 아는 일이다.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시행 후에는 처신이 더 힘들어졌다.
매일신문 입사 첫해 사회부 기자 시절이다. 불우이웃돕기 성격의 기사가 실리면 이를 본 시민들이 성금을 가져왔는데 이를 받고 간이 영수증을 작성해주는 일을 맡았다. 매번 10만~30만원의 성금을 가져온 한 기탁자가 붓글씨로 크게 '寸志'를 새긴 봉투를 따로 놓고 가 마음고생을 크게 한 기억이 있다. 그 봉투에는 항상 2만원이 담겨 있었다. 기탁자는 기자의 애원에 가까운 거절과 호소에도 촌지를 놓고 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촌지는 의미 그대로 기자 업무에 대한 정성을 담은 선물일까. 성금 기탁자에게 받은 촌지는 김영란법이 적용되는 현시점에서도 뇌물은 아닐 것이다. 이후 거마비가 포함된 많은 촌지를 받았고 거절하거나 돌려준 적도 있다. 지금도 명절이면 업무로 친분을 쌓은 이들로부터 농산물 선물을 받는데 기쁨보다는 갈등이 앞선다.
수산업자로 속인 김모(43·수감 중) 씨가 이달 내내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가짜 수산업자'로 불리는 그에게서 각종 뇌물성 선물을 받은 이들이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데 정치인, 공직자, 언론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지난 25일 김 씨로부터 금품 등을 수수한 혐의(청탁금지법 위반)로 종합편성채널 기자 정모 씨를 소환 조사했다. 정 씨는 서울 소재 모 사립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김 씨로부터 학비 등을 지원받은 혐의를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 씨는 '선동 오징어'(배에서 잡아 바로 얼린 오징어) 사업 사기 사건 피의자로 지난 4월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2018년 6월부터 올해 1월까지 투자 명목으로 김무성 전 의원의 친형 등 7명으로부터 116억2천여만원을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를 받고 있다. 그는 앞선 경찰 조사에서 검찰과 경찰 간부, 언론인 등에게 금품을 건넸다고 폭로했다.
경찰은 이 진술을 토대로 김 씨 등을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금품수수 혐의를 받는 인사들을 불러 조사하고 있다. 일부 피의자를 상대로 압수수색도 벌였다.
이달 11일 이모 부부장검사(전 서울남부지검 부장검사)를 시작으로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전 포항 남부경찰서장 배모 총경(직위해제)과 엄성섭 TV조선 앵커가 차례대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지난 24일에는 중앙일간지 기자인 이모 씨가 경찰에 출석했다.
경찰은 김 씨로부터 포르쉐 렌터카를 받은 의혹으로 입건된 박영수 전 특별검사에게도 조만간 출석 통보를 할 방침이다. 남구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지난 26일 의혹 속에 사퇴한 박 전 특별검사와 관련해 "주변인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남 본부장은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박 전 특검 소환을 조율 중이냐는 물음에 이같이 밝힌 뒤 "주변인 조사를 해보고 본인 조사가 필요하다면 일정을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했던 박 전 특검은 지난해 12월 김 씨로부터 렌터카와 수산물 등을 받은 혐의(청탁금지법 위반)를 받고 있다. 그는 이달 7일 사표를 낸 상태다. 특검법은 '특별검사 등은 형법이나 그 밖의 법률에 따른 벌칙을 적용할 때에는 공무원으로 본다'는 의제 규정을 두고 있다.
공직자나 언론인 등이 직무와 관계없이 1회 100만원 또는 연 300만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받으면 청탁금지법 위반으로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1회 100만원(연 300만원) 이하 금품을 받은 경우에는 처벌은 피하더라도 3천만원 이하 과태료 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박 전 특검은 지난 5일 김 씨로부터 대당 1억원이 넘는 포르쉐 승용차를 빌려 탔다는 의혹을 인정했으며 명절 선물로 대게, 과메기 등 수산물을 3, 4차례 받았다는 사실도 시인했다.
구속된 김 씨가 박 전 특검에게 금품을 제공한 이유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직무 대가성이 있다면 박 전 특검에게 뇌물죄가 적용될 수도 있다. 형법은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정했다. 수뢰액이 일정 금액을 넘으면 가중처벌된다. 1억원 이상이면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을 받을 수 있다.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은 경찰 내사를 받고 있다.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김 씨가 주 의원 측에 해산물 등을 제공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이달 초 참고인을 소환 조사했다. 경찰은 김 씨가 주 의원 측에 해산물 등을 보냈고 주 의원의 부탁으로 한 승려에게도 해산물을 전달했다는 의혹의 사실관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주 의원의 입건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주 의원과 관련된 정치권 인사들이 추가로 경찰 수사선상에 오르게 될지도 관심이 쏠린다.
김 씨 사건과 관련해 이름이 거론된 정치권 인사에는 박지원 국정원장과 김병욱 의원, 김무성·정봉주·이훈평 전 의원 등도 있다. 이들 중 일부는 김 씨로부터 선물을 받은 사실을 인정한 상태다.
문제는 경찰 수사를 받고 있거나 수사선상에 오른 이들의 도덕적 해이에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돌려줄 정도로 고가의 선물이 아니었다고 하거나 대신 다른 선물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나무랄 수 없지만, 누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느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김 씨가 어떤 이력의 소유자인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기에 비난하는 것이다. 김 씨는 2016년 사기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전력이 있다. 김 씨의 이번 사회지도층 농락 사건은 우리 사회가 선물과 뇌물을 구분하지 못할 지경에 처해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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