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가만히 불러 봐도 가슴이 뭉클거립니다. 위로 누님이고 막내가 여동생이며 가운데 여섯이 모두 아들로 저는 둘째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상처하여 이웃에 사는 열네 살 연하인 열여섯 살 어머니를 맞아들였지요. 어머니는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할 9남매의 막내였습니다. 외할머니께서 어디선가 본 사주팔자를 보고는 나이 많은 사람에게 재취로 들어가야만 고대 중국의 부자 '석 숭'이 부럽지 않게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믿고 따랐을까.
해방이 되던 그 해 가을에 전처소생의 여섯 살 된 딸과 세 살 아들의 '새어머니'가 되었지요. 넉넉하지 못한 살림살이를, 이불 홑청의 구김살을 펴듯 꾸려나갔습니다. 많은 식구의 입을 건사하기에 힘이 부쳐도 한마디 불평이 없었습니다. 양식이 부족할 땐 김치나 콩나물, 무를 넣은 국밥으로 뱃속을 채워 주었습니다. 자식들이 허기를 면하면 당신은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모르고 살았습니까.
어머니! 어머니는 빨래의 달인이었습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한스러움을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며 마음을 달랬을까. 온 가족의 빨랫감을 방망이로 두들기며 땟물을 빼고 마당에 널어놓으면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회 날처럼 옷들은 종일 그네를 탔지요. "애야! 단디- 잡으래이." 빨래를 다릴 때마다 어머니의 부름을 받으면 두말없이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저는 양손으로 가장자리 끝을 잡고, 어머니는 오른쪽 발로 한쪽 끝을 눌러 밟으며 왼손으로 다른 쪽을 잡은 후 오른손으로 다리미를 앞으로 밀었다 당겼다 반복했지요. 입 안에 머금은 물을 다림질감에 푸푸 뿜으면 무지개가 펼쳐졌습니다. 다리미가 지나간 자리엔 하얀 안개꽃이 피어나고, 주름이 쫙 펴지면서 보름달이 떴습니다.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1990년 음력 5월 5일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를 처음으로 업었습니다. 자식들을 거두느라 진이 다 빠져 그렇게 가벼웠습니까. 이듬해 7월 지산동 49평형 아파트로 옮겨오자 어머니는 '석 숭'이처럼 부자가 되었다고 무척 기뻐했습니다. 두 달 뒤 밤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풍을 맞아 누워계시던 아버지께서 뉴스를 보시다가 더듬더듬 저를 불렀습니다. 그때 어느 아주머니로부터 어머니가 돌아오셨느냐고 묻는 전화가 왔습니다. 비산동 한 회관에 불이 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TV에 계속 떴습니다.
어머니가 변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검게 그을려 쉬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긴가민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옆에서 쳐다보면서도 한참이나 살핀 뒤에야 가슴이 울컥 치밀었지요. 어머니의 얼굴이었습니다. 눈물은 등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더군요. 시뻘건 불꽃과 검은 연기 속에서 어머니는 숨을 멈춰버렸나 봐요. 한 시골 젊은이의 방화로 졸지에 16명의 사망자와 13명의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머니가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홀로 떠났습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 누워 있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얼굴을 덮은 천 아래로 두 손을 늘어뜨린 어머니의 손을 꽉 잡고 흔들어 봤습니다. 둥근 달이 붉은 구름에 싸여 서편으로 흘러갑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어머니의 입 언저리에서 맴돌았습니다. 어머니! 무슨 말을 그리도 하고 싶었습니까.
"어무이요, 인자 내려놓이소!" 꾹 닫혔던 제 입술이 열렸습니다. '인자 내려놓이소-' 메아리가 빈 하늘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르대요. 저는 잡았던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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