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崔茂宣)은 고려인이나 『고려사』 보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더 잘 알려졌다. 그는 처음 화약을 만든 무인(武人) 출신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의 싸움터를 누볐고, 중국의 화약제조 비법을 힘들게 배워 공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기록(1395년 4월 19일)에 실릴 정도였다.
그는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며 화약 제조에 매달려 마침내 성공했다.
덕분에 왜구도 물리쳤다. 하지만 왜구는 뒷날 서양의 조총(鳥銃)을 앞세워 임진왜란(1592년)으로 조선을 초토화하더니 다시 서양 함포(艦砲)로 강화조약(1876년)을 맺어 나라를 삼켰다.
◆홀로 폭탄 만들어 천둥 속 실험
나라가 망하자 한국인의 최무선 정신은 되살아났다. 이미 세종 때 최무선의 주화(走火)를 바꿔 신형 화기인 다연발의 신기전(神機箭)을 만들었고, 선조(임란) 때는 경상도 경주성 육지 전투에서 이장손 화포장이 시한폭탄격인 '귀신폭탄'이라 불린 작렬탄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로 왜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바다의 이순신은 거북선으로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자랑스런 조상의 피가 어디 갔겠는가.
첨단무기로 무장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가들은 최무선처럼 거듭된 실패 끝에 폭탄을 제조, 관리 처단과 관공서 폭파로 세상을 진동시켰다. 최무선이 임종 때 부인에게 "아이가 크거든 주라"며 남겼다는 화약 제조법을 적은 책이 아들 최해산(崔海山) 이후까지 전해지진 않았다지만 망국의 백성은 스스로 무기를 만들었다. 경북 칠곡 출신 장진홍(張鎭弘)도 그랬다.
1927년 6월, 어렵게 다이너마이트 30개와 뇌관 30개, 도화선 25척을 15원에 구한 그는 이를 재료로 폭탄 제조에 성공, 일제 응징 계획을 세웠다. 1927년 8월, 만든 폭탄 2개를 갖고 경북 칠곡군과 선산군 경계 산중 협곡에서 폭음이 새나가지 않도록 천둥 치고 비 오는 날 맞춰 1개씩 터뜨렸다. 협곡 양 벽이 무너지는 폭탄의 위력을 확인했다.
1927년 10월 18일, 일본인 경북도지사·경북경찰부장·대구 부호 장길상의 처단과 조선은행 대구지점 등 폭파에 나섰다. 그러나 조선은행 대구지점 배달 폭탄은 발각돼 건물 밖에서 터졌다. 엄청난 폭음은 대구와 조선을 진동시켰다. 그는 일본에 도피 중 잡혀 대구감옥에서 자결로 36세에 순국했다.
경상북도경찰부(현 경북경찰청)는 독립운동가 탄압이 전문인 고등계 경찰을 위해 『고등경찰요사』를 1934년 펴내며 장진홍의 폭탄 제조 전말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가 냄비·솥·괭이의 파편을 부수어 철 조각으로 사용해 폭탄을 만들고 천둥 치고 비 오는 궂은 날 인적 없는 산중에서 시험에 성공한 행적을 적었다. 장진홍의 무기제조 집념은 최무선과 다를 바 없었다.
◆의열단 무기 성능에 일제도 놀라
한국인의 대일(對日) 독립전쟁은 달걀로 바위치기였으니 무력은 피할 수 없었다. 대구에서 1915년 결성된 (대한)광복회나 옛 대구은행 출신 이종암 부단장의 군자금 등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1919년 출범한 의열단도 같았다. 두 단체가 무력으로 암살과 폭탄 공격 등에 나선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민족지도자 신채호 역시 6,400여 자(字) 장문의 '조선혁명선언서'를 통해 의열단에게 폭력·암살·파괴·폭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항일 투쟁을 고무, 격려했다. 뒷날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가 이봉창과 윤봉길 등 청년 애국지사의 의열투쟁을 지원한 일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의열단은 스스로 무기제조 조달에 나섰다. 마침 몽골의 경상도 출신 망명 의사 이태준(李泰俊)의 소개로 헝가리 군인 출신 '마자르'가 의열단 김원봉 단장·이종암 부단장 등과 합류, 상해에서 폭탄을 만들었다. 성능 시험은 상해 바다 밖 외딴섬에서 했다. 암살용 투척탄, 파괴용 장치탄, 방화용 소이탄 모두 만점이었다.
이들 무기 성능은 의열단이 1923년 3월 국내에 반입한 무기 가운데 방화용 폭탄 5개 , 파괴용 폭탄 뇌관 6개, 시계 6개, 권총 5정과 실탄 155발을 압수한 경찰이 조사한 결과를 보도한 1923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 그대로다.
"얼마전…당국에서 압수한 폭탄은…용산 포병(砲兵) 공병(工兵) 양대에서 장교 각 1명이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 출장하여 그 폭탄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투척용의 폭탄은 일본 육군이 사용하는 폭탄과 꼭 같은 것으로 비상히 정교하게 만들었다 하며, 장치용에 쓰는 것도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는데 그 세력은 참말 놀날 만큼 위대하며 큰 건물이나 큰 철교라도 대번에 산산히 부스러져 가루가 되리라더라."
◆광복회 우재룡 방탄복 제조 시도
애국지사들은 호신용 '방탄복' 제조도 시도한 정황이 남아 있어 놀랍다.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 우재룡 지휘장의 예심재판 기록에 나오는 '방환신'(防丸申) 개발 관련 기록이 그렇다. 방탄복쯤으로 보이는 옷 개발 성공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놀랄 만한 시도이다.
판사가 "방환신이라고 칭하는 것을 발명하여 그 제조에 종사하는 의논을 위해 대정 4년(1915년) 10월 초경 박상진 집에 간 일이 있는가"라 묻자 우재룡은 "그런 일 없다"며 부인했다. 판사가 다시 "박상진 집에…모여 방환신의 시험을 한다고 하면서 판자 같은 것을 멀리 세워 놓고, 권총으로 사격하였던 바 관통하였으므로 방탄은 될 수 없다는 것으로 되었으나, 관통하지 않았으면 박상진에게 자금을 받기로 하였다고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묻자 역시 아니라면서 부인으로 일관했다.
비록 우재룡의 거듭된 부인으로 끝났고 방환신의 개발 결과가 궁금하지만 많은 자료들이 압수 또는 멸실된 까닭에 진실 규명에는 시간이 더 걸릴 듯하다. 이밖에 애국지사들의 무기 개발에 대한 사연은 숱하다. 일부 자료만으로라도 만난(萬難)에 굴하지 않고 최무선처럼 독립전쟁에 쓰일 무기 제조·조달에 나선 그들을 기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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