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 여행에세이를 집어든다는 건 떠나고 싶다는 내적 의지의 충실한 이행이다. 글로라도 읽어보겠다는 것이다. 독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각오를 다진다는 건데 작가에 대한 팬심이 있다면 더 확실하다. 먹방 유튜버에 열광하는 구독자들의 충성도에 못지않다. 마음은 여행지에 이미 도착해 있다.
'여행'이라는 말이 들어간 에세이치고 망작은 없다는 출판업계 속설이 유효했던 이유다. 특히 코로나19가 일상의 여행을 온갖 제어 필터로 거른 뒤부터는 정설로 공고해졌다. 쓰려는 욕구와 떠나려는 욕구를 동시에 충족한다.
처방전이 필요없는 아드레날린 자극제, 여행에세이 한 편이 2021년 휴가시즌에 앞서 또 출간됐다. 2020년대 대세 작가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는 정세랑 작가가 썼다. 제목이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다. 400페이지로 두툼하다.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이 두둑하게 들었다.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이들의 자극제로 든든해 보인다.

세계 5개국의 유서 깊은 도시(미국 뉴욕, 독일 아헨, 일본 오사카, 대만 타이베이, 영국 런던)를 거점으로 그 주변을 여행하며 느낀 점을 정리했다. 2012년 5월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 두고 뉴욕으로 간 게 시작이다. 그때라면 작가가 '옥상에서 만나요'라 하기 훨씬 전이다. 물론 당시에도 작가는 장편소설 두 권(덧니가 보고싶어, 지구에서 한아뿐)을 낸 작가였는데 많이 팔리진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작가는 여행이라기보다 머묾에 가까운 일정을 누린다. 2014년 10월 런던 여행까지의 기억이 이 책에 담겼다. 10년 전 여행기인 셈인데 그 사이 공간과 제도의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 예를 들어 대규모 재개발로 그 일대가 사라졌거나 여행 불가능 지역이 됐다거나 하는 것들 - 여행기는 유의미하다. 다시 볼 수 없고, 다시 갈 수 없다는 회한이 여행기에 들어있을 것이기에. 실제로 뉴욕의 9.11 메모리얼파크와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서 작가는 오래 들여다봤고, 그 느낌을 독자와 나누려 한다.

무엇보다 작가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애로 현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데 매우 익숙하다. 그게 책의 제목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뜻밖의 구석에서 '도를 아십니까' 급의 제언도 튀어나온다. 다음은 벨기에 여행 경험담의 한 토막이다. 궁서체로 쓰이지 않았을 뿐 행간은 매우 진지하게 읽힌다.
"오줌싸개 동상 앞에 맛있는 와플 가게가 있다기에 찾아갔다. 플레인 와플 하나, 온갖 토핑을 얹은 와플 하나를 시켰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레인 와플이 훨씬 맛있었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플레인 와플을 시켜야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책의 모든 내용을 잊고 '벨기에에선 플레인 와플'만 기억해준다 해도 나는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여행객이 머나먼 벨기에까지 와서 축축한 와플을 먹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녹아있는 문장이다. 이쯤 되면 취향의 영역을 넘어선 '보편적 인류애'다. 현지인의 행태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는 논지로 풀이된다. 왜 그리 많은 이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 것)'을 입증하면서 품평에 적극적인지 순식간에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정세랑 작가가 먹는 것에 진심인, 심혈을 기울여 지면을 대량 할애하는 작가는 아니다. 먹는 것이라고는 초콜릿, 쿠키, 녹차, 취두부 등(세어보니 꽤 된다.)이 띄엄띄엄 소개되고 있다. (먹는 것에 진심인 이는 몇 달 전 '돈키호테의 식탁'을 쓴, 식당까지 운영했던 천운영 작가가 있다.)

에세이의 장점 중 하나는 작가가 사적인 영역을 대놓고 공개한다는 점이다. 정세랑 작가 역시 이 에세이에서 단편소설 몇몇의 탄생 비화를 써줬다. '익명소설'에 실린 '해피쿠키이어'를 독일 아헨의 명물이라는 프린텐(printen) 쿠키를 원동력 삼아 써냈다는 사실이나 '알다시피, 은열'을 쓰게 된 모티브가 왜관에서 심심찮게 있었다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연애사건이었다는 것 등이다. 나아가 자신이 읽은 다른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등의 알림도 자연스럽다. 작가의 기혼 사실도 자연스럽게 공개되는 분위기다. 400쪽, 1만6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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