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정경석(여행작가) 씨 부친 정명운 씨

정경석 씨 부친 정명운 씨 생전 모습. 가족제공.
정경석 씨 부친 정명운 씨 생전 모습. 가족제공.

58년 전 어느 날, 동네 어른이 우리 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어머니께 신문을 보여드리셨다. 일간신문의 하단에 있는 광고모델이 우리 아버지 얼굴이었다. 일동제약의 신제품 비타민 '아로나민'을 출시하면서 컨셉을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시리즈 광고물로 제작하는데 각 분야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을 모델로 선정한 그 첫 번 대상자가 제철 회사의 용광로 옆에서 16년 동안 일하시던 아버님이었다. 철은 당시 한국의 산업화에 절대 필요한 쌀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의지의 한국인' 광고는 아버님을 시작으로 항공 조종사, 컴퓨터 전문가, 건축가, 철도기관사, 등대지기, 도예가 등 총 12명이 2개월씩 광고 모델로 등장하였다. 광고를 찍고 나서도 가족들에게조차 말씀하지 않으신 아버님은 참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이셨다.

1921년생인 아버님은 23살에 결혼 후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해 화수동 부둣가에서 배 목수로 잠시 일을 하시다가 1955년 대한중공업에 입사하셔서 용광로가 있는 고로 파트에서 일을 하셨다. 대한중공업은 1964년 인천제철로 사명을 바꾸었고, 2006년 현대그룹이 인수하여 지금의 현대제철로 포항제철에 이어 국내 2번째 큰 기간산업체다.

1,500도에서 2,000도의 끓는 쇳물이 있는 용광로는 한 번 불을 붙이면 쉽게 끌 수 없다. 따라서 24시간 작업해야 했지만, 당시는 2교대 근무였기에 우리 7남매의 형제들은 교대로 아버님의 저녁 도시락을 운반해야 했었다. 거의 휴일이 없이 현장에서 일하시는 아버님의 작업복은 늘 불똥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다리에는 덴 흔적이 많았다.

故 정명운 씨가 생전에 찍은 제약회사 광고. 가족제공.
故 정명운 씨가 생전에 찍은 제약회사 광고. 가족제공.

아버님은 직장에서 엄격하지만 좋은 상관이셨는지 매년 생신날이면 직원들이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특히 어떤 직원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때 목숨을 구한 일도 있었기에 그분들이 새벽부터 와서 축하를 드리는 것을 매년 보았다. 아버님 생신날은 시골 친척들까지 모두 우리 집으로 모여 거의 동네잔치였었다. ​1981년은 아버님 생신날, 저의 첫 직장 입사 합격 전보가 왔지만, 생일잔치에 묻히고 말았다.

인천제철에서 근무하시다가 70년대 초 포항제철이 설립되면서 대규모의 기술 인력이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기에 며칠간 한숨을 쉬며 깊은 고민 후, 결국 인천제철에서 당시 55세의 정년까지 근무하고도 5년을 더 근무하시고 은퇴하셨다.

내 기억에 아버님은 집에서 쉬시는 날은 거의 없었고 놀러 다니시는 것도 보지 못했으니 집과 회사 외엔 다른 생활이 없으셨다. 늘 이른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나가시는 아버님을 어머니가 문 앞까지 나가셔서 배웅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버님은 정말 엄격하신 분이셨다. 자식들을 큰소리로 혼낸 적은 없지만 단지 위엄만으로도 우리 형제들은 꼼짝 못 했다. 아버님이 크게 화를 내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하며 자랐다. 단지 내가 대학 시절, 늘 나돌아다닌다고 혼난 적은 있었다. 그건 아마 아버님이 화를 내기 이전에 어머님이 자식들을 미리 꾸짖고 혼내셨기에 굳이 아버님까지 자식들에게 큰 소리를 내지 않으셨던 것 같다.

내가 평생 대기업에서 쇠를 다루는 플랜트 건설 관련 직장생활로 은퇴를 한 것은 아버님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님, 아주 많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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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이 유명을 달리하신 지역 사회의 가족들을 위한 추모관 [그립습니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귀중한 사연을 전하실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서를 작성하시거나 연락처로 담당 기자에게 연락주시면 됩니다.

▷추모관 연재물 페이지 : http://naver.me/5Hvc7n3P

▷이메일: tong@imaeil.com

▷사연 신청 주소: http://a.imaeil.com/ev3/Thememory/longletter.html

▷전화: 053-251-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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