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하향주 제대로 알리고 싶습니다."
15일 오전 대구 달성군 유가읍 증산저수지 인근에 도착하자 '하향주가'라는 글씨가 새겨진 석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굽이진 골목을 따라 들어가니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곳에는 대구시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된 전통 민속주인 '비슬산 하향주' 계승자 박환희(72) 씨가 살고 있다. 박 씨는 정미소를 운영하며 술을 담으시던 할머니의 명맥을 잇기 위해 술을 담고 있다. 또한 그는 1천100년이라는 전통을 이어온 술의 가치를 구전만이 아닌 실물로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향주(荷香酒)는 술에서 연꽃향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 씨의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시절 누룩을 못 만들게 했지만, 정미소를 운영하며 몰래 만들어 판매하셨다. 해방 이후 6·25전쟁 후에도 여전히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이른 아침 정미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막걸리나 동동주를 대접했다. 박 씨는 5~6살쯤부터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누룩을 밟기도 하고 잔심부름을 했다. 당시 정미소는 그의 놀이터였다. 그의 할머니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술의 역사와 누룩의 중요성, 제조 방법 등에 대해 자주 알려주셨다.
특전사 출신인 박 씨는 전역 후 80년대 초 매형과 누나가 사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 과일, 야채, 식료품을 판매하는 마켓을 운영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대통령 경호에 나선 특전사 출신 동료들을 만났고, 1993년 특전사 동기회 창립총회의 초청장을 받아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1995년 귀국해 고급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가업을 물려받아 하향주 만들기에 매진했다. 사실 1년에 1회씩 3번까지는 미국에 들어가 영주권을 유지했지만, 이후론 포기, 미국에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할머니, 어머니의 가업을 이어가기 위해 본격적으로 술을 만들기 시작한 그에게 현실은 냉혹했다. 2003년 가을 태풍 매미로 인해 당시 술 탱크와 분쇄기, 믹서기, 공장 전체가 빗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이후 땅을 매입해 술 담을 공장을 지으려 했지만 3번이나 허가를 받지 못했다. 당시 한 지역 유지가 도시공원으로 지정된 자신의 부지를 공원화하지 않기 위해 박 씨의 공장을 유치하려고 술책을 부려 설립 허가가 늦어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더욱더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누룩은 삼복더위에 띄운다고 한다. 한여름이면 오전 4~5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그는 고생하지 않으면 좋은 술이 나올 수 없다고 믿는다. 박 씨는 사람이 편하게 사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듯, 좋은 술을 만드는 누룩 속 미생물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향주의 기본인 누룩이 좋아야 좋은 술을 담을 수 있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누룩의 명맥이 끊기고, 대부분 배양효모로 술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는 누룩을 고집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듯 자연에서 얻는 것이 조화롭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하향주의 경우 아세트알데하이드 등 숙취 원인 물질이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경영 악화 소식을 들은 중국, 일본 등에서 그에게 거액을 제안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하향주의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박 씨는 어려운 상황에서 겨우 버티고 있으며, 실제로 두 차례나 경매에 부쳐져 일부 부지를 매각했다. 매각 후 용적률 때문에 멀쩡한 창고를 부수기도 했다.
그는 크라우드 펀딩 제안과 대학생들의 응원에 힘입어 사업을 이어가기로 했다. 다만, 대구시 무형문화재 자격은 오는 10월 반납할 예정이다. 박 씨는 분야의 전문가를 배제한 탁상공론으로 만들어낸 현실과 동떨어진 규약과 규범 등을 반납 이유로 꼽았다. 박 씨는 반납 후 민속주가 아닌 전통주인 '하향주'로 전세계인들에게 1천100년 술맛을 선보이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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