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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날마다 만우절

날마다 만우절 /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아동용 킥보드. 윤성희의 단편
아동용 킥보드. 윤성희의 단편 '어느 밤'에서 할머니 덕선은 놀이터에서 빌린 아동용 킥보드를 타며 스트레스를 푼다. 출처: 네이버카페 미즈넷
날마다 만우절 /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펴냄
날마다 만우절 /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음, 제가 LA에 있을 때는 말이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전개다. 전 메이저리거 야구선수 박찬호의 말을 글로 옮긴 건가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이야기가 끝맺을 낌새가 안 보인다. 박찬호 선수의 이야기도 곰곰이 듣다 보면 수다스럽다기보다 재미있는 포인트가 간간이 나오는데 - 이야기가 너무 길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듣던 사람 귀에서 피가 나는 설정이 있긴 하다 - 그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다면 괴기스럽게도 눈에서 피가 날 것 같지만 그건 또 아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소설의 시작이다. 친절한 택시기사는 오토바이 때문에 사고가 날 뻔한 위기를 넘기자 예전에 있었던 오토바이 사고 얘기를 꺼낸다. 그런데 그게 아들에게 구워주려던 삼겹살을 사러 가던 길에 있었던 사고였다. 아들은 물류센터에 취업해 밥을 세 그릇이나 비울 정도로 격무에 시달리던 터였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사고를 당하자 아들은 엄마를 위해 일을 그만 둔다. 교통사고 이야기는 마을버스 급정거로 엉치뼈에 금이 간 언니 얘기로 이어졌다. 언니는 병원을 잘못 골라 고생했다. 병원 얘기는 돌팔이를 만났던 경험담으로 넘어갔다…

아, 그리고 말이지.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우주팽창 네버엔딩스토리가 별 거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의식의 흐름처럼 보이지만 스키 선수의 활강처럼 삐끗하는 대목 하나 없이 자연스럽다. 고수의 내공이 글에서 뿜뿜 뿜어져 나온다. 이 얘기가 왜 갑자기 튀어나왔지 싶어 되짚어 보면 어떤 식으로든 연결고리가 있다. 영역 표시처럼 명확한 '윤성희 표 소설'이다.

전 메이저리거 박찬호. JTBC
전 메이저리거 박찬호. JTBC '냉장고를 부탁해' 화면 캡처

윤성희 작가가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을 냈다. 2019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어느 밤'을 비롯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발표된 단편소설 아홉 편을 실었다.

표제작인 '날마다 만우절'은 가장 최근 작품이다. 암에 걸렸다며 온식구를 자신의 거처로 불러모은 뒤 거짓말이었다고 웃어 넘기는 고모의 말을 시작으로 '누가누가 구성지게 거짓말 잘하나' 대결이라도 하듯 온 가족들이 하나씩 저마다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자세히 듣고 보면 진짜 있었던 이야기로 들린다.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만우절을 빌려 풀어내는 것이다. "자, 이건 아시다시피 거짓말인데…"라고. 그렇게 각자의 묵은 감정과 응어리를 해피엔딩 방식으로 풀어낸다.

노년의 고독. 매일신문 DB
노년의 고독. 매일신문 DB

미장원에 모인 아줌마들의 토크쇼를 보는 듯한 단편소설들의 연결이다. 한참 얘기를 듣다 보면 '저 아줌마가 원래 하려던 이야기가 뭐였지' 하며 잊기 십상이다. 그러고 있으면 때마침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너 이쯤에서 까먹을 줄 알았지, 여기까지 얘기했지'라며 일깨운다.

윤성희 작가의 소설은 실제로도 우리 이웃의 이야기, 슬프고 애처롭고 애잔한 이야기들을 줄줄이 연결해 완성해낸다. 보증 잘못 서서 가정이 파탄나고, 사고로 누군가가 죽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하고, 파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복잡한 가정사에 속앓이하고, 난치병에 걸리고, 말년에는 치매로 고생하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런 사건들에 심각하게 감정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흘려버리듯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 작가의 힘이다.

대구 중구 향촌동의 한 성인텍(카바레)으로 입장하는 노년들. 매일신문DB
대구 중구 향촌동의 한 성인텍(카바레)으로 입장하는 노년들. 매일신문DB

특히나 작가의 소설에서는 노년 여성들이 주인공 역할을 자주 맡아 등장한다. 어느 만큼 살아서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이들의 살아있는 철학이 묻어있는데 그걸 잡아내는 건 독자의 영역이다. 삶을 마감하는 순간이면 으레 자기 생의 빛나는 부분을 돌이킬 것 같지만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주인공들은 억울해하던 한(恨)을 복기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쓰는 동안 나는 사람들 마음에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빨려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구멍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덜 외로울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들에게 다정해지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는 토닥임에 힘을 얻는다. 늪인 것만 같던 진밭에서 발을 쭈욱 빼 나가려 시도해본다. 윤성희 소설의 힘이다. 316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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