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고 카드는 선착순이다. 불합리해 보이지만 가장 합리적인 선택 수단으로 보인다. 다만 군대 등에서 얼차려를 하는 수단으로 오랜 기간 시행되면서 선착순은 다수에게 나쁜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뉴스사이트에서 선착순을 검색하자 정부와 지자체, 은행, 백화점, 항공사 등 숱한 곳에서 선착순 접수와 판매 글이 나온다. 발 빠른 사람만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경쟁을 회피하는 성격 탓일까. 게으름 때문일까. 코로나19 백신 접종 예약 과정에서 많은 대상자가 제대로 한 방을 먹었다. 50대 국민이 대표적이다.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할 정부 정책이기에 신뢰 상실과 배신감은 배가했다.
지난 12일 0시. 코로나19 접종 사전 예약시스템에 컴퓨터와 휴대전화로 접속하려다 계속되는 시스템 오류 문구에 포기했다. 예약이 17일까지 가능하다기에 여유를 가졌으나 이날 오후 3시 30분쯤 백신 보유 물량이 동나서 조기 마감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여기저기 주위를 확인하니 모두가 부지런했다. 새벽까지 잠을 설치며 아들, 딸의 도움을 받아 접종 예약에 성공했다고 한다. 55~59세 전체 접종 대상자 약 352만4천 명 중 절반이 조금 넘는 185만 명이 예약에 성공했다.
빗발친 항의 때문이었을까. 예약 중단 이틀 만인 14일 55~59세 백신 예약은 재개됐고, 이번에는 사이트가 열리는 오후 8시 이전부터 컴퓨터 앞에 대기했으나 또 물을 먹었다. 일찍 열린 사이트도 있었는데 정부 시스템에서 기다리다 낭패를 본 것이다.
남은 예약 기간을 믿고 또 여유를 부렸으나 오후 10시쯤 딸이 8월 9일로 접종 예약을 대신했다고 알려줬다. 정부 시스템은 19일 53~54세 대상 백신 접종 예약에서도 '먹통'이 됐다. 세 차례 연속으로 같은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우리는 일개 국민이자 시민으로 정부와 지자체 정책에 호응하며 살고 있다. 거듭되는 실정에도 다수 국민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부에 대한 비난을 자제한다. 하지만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 문제로 사실상 선착순 접종이란 어처구니없는 일에 직면하자 비난이 들끓었다.
백신 도입 일정이 불확실해 빚어진 일이라고 보건 당국은 설명했지만, 국민 안전 문제를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해도 되는지 답답하다. 시기적으로 4차 대유행의 본격화로 예약 폭주는 예고된 상태였다. 당국은 예약 신청이 분산될 것으로 보고, 그 사이 물량을 들여오면 된다는 안이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백신 도입 시기와 물량이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미리 솔직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더라면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50~54세는 나이 별로 더 세분화해 예약을 받기로 했는데 사후약방문이다.
정부의 백신 접종 정책이 주먹구구식임은 청해부대의 집단 발병으로 명확해진다. 더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무능 정부의 극치를 보여주는, 국가 가치를 훼손하는 사태이다. 북한에 줄 백신은 있는데 최전선에서 국위를 선양하는 파병 장병들이 백신 접종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었다는 사실에 국민은 분노하고 있다.

아프리카 해역에 파병 중인 청해부대 34진 문무대왕함(4천400t급) 승조원 301명 중 82.1%인 247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으로 19일까지 집계됐다. 나머지 50명은 음성, 4명은 '판정 불가'로 통보받았다고 합동참모본부는 밝혔다.
감염자 중에는 함장, 부함장 등 지휘부가 포함됐다. 승조원 전원이 백신을 접종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의 모든 인원이 감염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단일공간에서 발생한 유례 없는 집단감염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청해부대 집단감염 규모는 최근 110여 명이 확진된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의 두 배를 웃도는 수준으로, 지난해 2월 군내 최초 확진자 발생 이후 최대 규모다.
졸지에 우리 군은 사상 초유의 '감염병 귀국'을 위한 작전을 했다. 군은 200명 규모의 특수임무단과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수송기(KC-330) 2대를 동원, 현지로 날아가 20일 청해부대 34진 전원을 국내로 이송했다.
특수임무단은 해군 148명, 공군 39명, 의료진 13명 등 약 200명으로 구성됐으며, 전원 유전자 증폭(PCR) 검사서 음성 판정을 받았고 백신 접종도 완료했다. 해군은 문무대왕함을 인수해 국내로 복귀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청해부대 집단감염 사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동안 해외에서 대형 크루즈 선이나 군 함정 내 집단감염 사례가 있었음에도 우리 군은 관련 매뉴얼 대응조차 부실했다는 지적이다.
이미 지난 4월 해군 상륙함 '고준봉함'에서 승조원의 약 39%가 감염되는 사태를 겪고도 초기 늑장 대응과 방역 조치 미흡으로 함정 집단감염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지난해 미국 해군의 핵 추진 항공모함 루즈벨트함에서는 1천 명 이상의 확진자가 발생, 작전을 중단하고 괌으로 긴급 피항한 바 있다.
청해부대는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하는 함정 특성상 부대원 전원이 코로나19 음성이기 때문에 안심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외부에서 물자를 보급받는 과정에서 바이러스 유입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점도 논란이 되고 있다.
군 당국이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데 대한 비판도 나온다. 군 당국은 청해부대 34진이 출항한 지난 2월에는 장병 예방접종이 시작되기 전이라 백신을 맞을 수 없었다고 했다. 또 예방접종 후 이상 발생 시 응급상황 대처가 제한되는 점, 함정 내 백신 보관이 어려운 점 등을 고려해 현지 접종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청해부대 34진이 백신 접종을 하지 못한 것은 정부 정책의 실패라고 꼬집고 있다. 현지 출발 후에도 이번 사태를 예방하는 조치를 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정부의 뒤늦은 대응에 정치권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논평을 통해 "북한에 줄 백신은 있으면서, 청해부대 장병들에게 줄 백신은 없었다는 것인가"라며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게 아니라 의지가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질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북한이 동의한다면 백신 공급 협력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정부 내의 의사 결정이 순리에 맞게 합리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중앙방역대책본부(방대본) 등에 모인 수많은 당국자와 전문가의 판단 능력이 이 정도인가. 정부 설명대로 방역 정책이 '집단 지성'의 결과물인가.
방역 당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방부, 해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군인들의 접종 순위는 국방부가 정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30대 이상 군 간부, 군 장병, 북한 군인, 파병 부대원 순서인가. 청해부대 34진에 대한 사후 백신 접종이 사실상 어려웠다는 군의 변명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이번 사태 발생 전에 아프리카 미군 기지 등에 청해부대원이 맞을 백신을 군용기에 실어 보냈으면 될 문제였다고 방역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정부 내에 코로나 사태 전반을 총괄하는 지휘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휘부가 어디이며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지, 소통은 원활한지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려면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우선되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말까지 떨어지지 않는 지지율에 고무돼 있을 때가 아니다. 방역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철저히 점검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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