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 땡볕에 고고한 기품 뽐내는 ‘양반꽃’ 능소화

대구 중구 대봉1동에 있는 경일빌딩 지상 4층 건물 한쪽 벽면을 거의 뒤덮다시피 한 능소화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대구 중구 대봉1동에 있는 경일빌딩 지상 4층 건물 한쪽 벽면을 거의 뒤덮다시피 한 능소화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올해 여름도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뜨거운 여름을 염천(炎天) 혹은 열천(熱天)이라고 한다. 땡볕이 가마 같은 열기를 내뿜어 대기를 달구면 한 뼘의 그늘이 그립다. 이런 더위에도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꽃을 피우는 나무가 능소화다. 배롱나무, 무궁화와 더불어 능소화는 무더운 여름에 꽃 피는 대표적인 나무다. 물론 엄나무나 두릅나무도 소박한 꽃을 피우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역부족이다.

무궁화, 배롱나무꽃(목백일홍), 능소화는 공통점이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오랫동안 핀다. 능소화는 6월말 무렵부터 8월까지 이글거리는 햇살을 무시하고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무궁화, 배롱나무는 무려 100일 가량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다. 물론 한 송이가 오래 동안 버티는 게 아니라 한 송이가 피었다 지면 다른 송이에서 계속 피고 지는 일을 석 달 열흘가량 되풀이 한다.

또 능소화와 무궁화는 꽃잎이 한 잎 두 잎 흩날리며 떨어지지 않고 꽃송이째 통꽃으로 떨어져 자못 비장함과 장렬함을 느끼게 한다.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 밤에 꽃잎을 오므리고 시들며 진다. 이에 비해 겨울 하얀 눈밭에 통꽃으로 떨어지는 붉디붉은 동백꽃처럼 여름 능소화도 시들기보다 꼿꼿이 뙤약볕을 받으며 이틀정도 버티다가 싱싱한 '그 모습 그대로' 담장 아래로 깨끗이 지고 마는 운명을 타고났다.

안동시 정하동에 있는 원이엄마 테마공원.
안동시 정하동에 있는 원이엄마 테마공원.

◆원이엄마의 변하지 않는 사랑의 징표

이런 까닭에 작가 조두진이 쓴 소설 「능소화」의 주인공 '원이 엄마' 여늬의 사랑이 떠오른다. "바람이 불어 봄꽃이 피고 진 다음, 다른 꽃들이 더 이상 피지 않을 때 능소화는 붉고 큰 꽃방울을 터뜨려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 산짐승과 들짐승이 당신 눈을 가리더라도 금방 눈에 띌 큰 꽃을 피울 것입니다. 꽃 귀한 여름날 그 크고 붉은 꽃을 보시거든 저인 줄 알고 달려와 주세요. 저 붉고 큰 꽃이 되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처음 당신이 우리 집 담 너머에 핀 능소화를 보고 저를 알아보셨 듯, 이제 제 무덤에 핀 능소화를 보고 저인 줄 알아주세요." 죽은 남편과 재회를 소망하며 내뱉는 소설 속 넋두리지만 간절함이 묻어난다.

1998년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의 택지조성 과정에 무연고 분묘에서 400여 년 전에 죽은 남자의 시신이 미라상태로 발견됐다. 망자는 조선 명종 때 사람 이응태(1556~1586)며 그의 관에서는 아내 '원이엄마'가 쓴 남편에 대한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한글편지와 머리카락을 잘라 삼 줄기와 엮어 만든 미투리(신)도 함께 나왔다.

"당신 늘 나에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안동시 정하동 '원이엄마 테마공원'에 있는 애절한 편지의 한 구절을 현대적으로 옮긴 것이다. 안동시는 공원을 만들고 원이엄마의 절절한 사부곡(思夫曲)의 편지를 돌에 새겨놓았다. 그리고 주변에 능소화를 심어 400여 년 전의 사랑을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날에 기리고 있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 인흥마을의 혁채가에 능소화가 활짝 피어 있다. 사진 동호인들이 몰려드는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 인흥마을의 혁채가에 능소화가 활짝 피어 있다. 사진 동호인들이 몰려드는 '포토 스팟'이다.

◆하늘을 무시(?)하는 자람

담이나 건물벽 혹은 나무에 뿌리를 달라붙이면서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능소화는 보통 10m까지 자란다고 알려져 있다. 담쟁이처럼 흡착뿌리를 가지고 있어 덩굴손이 없어도 벽이나 담장, 나무에도 줄기를 잘 뻗어나간다. 등나무나 칡 줄기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때 물체를 감아서 올라가지만 능소화는 뿌리가 벽이나 나무에 찰싹 달라붙어 기듯이 뻗어간다.

이런 자람 때문에 능소화(凌霄花)라는 이름을 고향인 중국에서 얻게 됐다. 한자를 풀어보면 업신여길 凌(능)자에 하늘 霄(소)자를 쓴다. '하늘같은 양반을 능멸하고 업신여긴다기'보다 나뭇가지나 벽을 타고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모습을 연상해 해학적으로 이름 짓지 않았나 생각한다. 양반들이 이 꽃을 좋아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양반집에만 심을 수 있고 일반 백성들이 심으면 '경쳤다'는 말도 있다.

능소화가 우리나라에 언제 전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시대 학자 성현(成俔·1439~1504)이 쓴 문집 『허백당보집』(虛白堂補集) 제2권 「외가팔영」(外家八詠)에는 콩에 대해 읊으면서 '…… 引蔓向空回(인만향공회·공중으로 넝쿨을 뻗어 가누나)/ 紫萼凌霄短(자악능소단·능소화보다 작은 붉은 꽃 진 뒤)/ 靑稭豆莢堆(청개두협퇴·줄기에 조랑조랑 열린 꼬투리)/ 殷勤爲收子(은근위수자 ·정성스레 씨앗을 갈무리했다)……'라는 구절에 능소화를 소환해 콩 꽃과 비교한 것을 보면 그 이전에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능소화.
능소화.

◆작은 트럼펫 연상

능소화는 봄에 새 가지에서 잎이 나기 시작한다. 마주보며 달리는 큰 잎자루에 작은 잎이 일곱이나 아홉 개씩 달리는데 잎 가장 자리는 톱니같이 생겼다. 봄에 돋아난 새잎들이 무성해지는 여름이 가까워지면 긴 꽃차례(꽃이 줄기나 가지에 붙어 있는 상태)를 시원하게 뽑아낸다. 가지 끝에서 자란 꽃대에 열 송이 안팎의 꽃송이가 주렁주렁 달리면 꽃자루는 제 무게를 못 이기고 아래로 축 늘어진다.

멀리서 보면 거꾸로 된 원뿔모양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꽃자루들이 나름대로 질서가 있다. 동서로 마주나면 그 아래는 남북으로 마주나고 서로 겹치지 않게 엇갈리면서 나팔모양 꽃송이를 매단다. 꽃은 노란 색이 들어간 붉은 색의 주황색으로 색감이 아주 뚜렷하고 강하다. 다섯 개 꽃잎이 얕게 갈라져 있고 옆에서 보면 기다란 깔때기 모양의 끝에 꽃잎이 붙어 있어 보통 작은 트럼펫을 연상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양반가문의 고택이나 사찰에서 주로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를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공원이나 도로변, 산책로, 아파트 단지에도 흔하다. 그런데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는 꽃부리가 길고 능소화보다 색깔도 더 붉을 뿐만 아니라 꽃차례가 꽃자루 끝에 여러 송이가 모여 있는 미국 능소화가 많이 심어져 있다.

◆인흥마을과 경일빌딩의 명물

대구경북에 능소화가 아름답게 핀 곳이 많다. 남평문씨 세거지인 달성군 화원읍 본리의 인흥마을은 능소화가 피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포토 스팟'이다. 고즈넉한 마을 고택의 흙담 기와에 걸쳐있는 능소화는 화용의 기품이 있고 자태가 곱다. 담에 걸쳐진 꽃이 특히 빼어나게 아름다운 혁채가의 능소화는 대문과 흙담 사이 골목과 푸른 산을 한 장에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주인 어르신 부부가 나무를 잘 가꾼 덕분에 사진 촬영 명소가 됐다. 인흥마을 골목 곳곳에는 능소화가 담장을 넘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날이면 젊은 연인들이 추억 만들기에 바쁘다.

대구 도심에도 웅장한 수세(樹勢)를 자랑하는 능소화 명물이 있다. 중구 대봉1동의 경일빌딩의 지상 4층 높이 건물 한쪽 벽면을 거의 뒤덮다시피 해 장관을 이룬다. 김광석 길 서쪽에 위치한 이 빌딩의 관계자는 "수 십 년 전에 건축을 마치고 건물에 여름철 직사광선을 줄이기 위해 담쟁이와 능소화를 심었는데 워낙 잘 자라 수세에 밀린 담쟁이덩굴은 햇빛을 못 봐서 말라 죽었다"고 말했다.

두 그루의 능소화가 가지를 여러 가닥으로 뻗어 얽혀 있는데 큰 것은 밑동 둘레가 70cm도 넘었다.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탑사의 수직암벽을 타고 올라가는 능소화의 위용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빌딩 벽면을 가득 채워 '수직정원'(Green Wall)을 이뤄 6월 말부터 꽃들이 활짝 피기 시작하면 폭포처럼 쏟아질 듯 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경주 교동의 교촌마을의 기와집에 살아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능소화도 해마다 이름값 하며 장관을 이룬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교촌마을에 능소화가 살아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교촌마을에 능소화가 살아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능소화 꽃가루 독성은 오해

어릴 때 능소화 꽃가루가 해롭다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들었다. 특히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실명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꽃을 만지면 손을 씻고 눈을 비비지 못하게 했다. 이런 잘못 알려진 속설은 어디서 유래됐을까?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52권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5」에는 "또 능소화(凌霄花)·금전화(金錢花)·거나이화(渠那異花)는 모두 독이 있어 눈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능소화를 쳐다보다가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이 눈에 들어갔는데, 그 후 실명(失明)했다"(又曰 凌霄花金錢花渠那異花 皆有毒 不可近眼 有人仰視淩霄花 露滴眼中 後遂失明)는 구절에 나온다.

전문가들은 "능소화 꽃가루를 연구한 결과, 독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표면이 가시 또는 갈고리 형태가 아닌 매끈한 그물 모양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에 상처를 내기도 힘들며 꽃가루가 공중에 날릴 염려도 없다"고 밝히며 "일부러 꽃가루를 채취해 눈에 문지르지 않는 한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말한다. 오해와 소문이 사람들로 하여금 능소화를 멀리하게 하고, 사대부들만 그 아름다움을 알음알음 즐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미국 능소화.
미국 능소화.

능소화가 나오는 소설로는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도 빼 놓을 수 없다. 관능적인 여인 '현금'이 어릴 적에 살던 이층 집의 능소화를 언급한 대목은 소설의 대강을 암시한다.

"여름이면 이층 베란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 올라가 난간을 온통 노을 빛깔의 꽃으로 뒤덮었다. 그 꽃은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하여 쨍쨍한 여름날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 처음 느껴본 어렴풋한 허무의 예감이었다."

시들기보다 통꽃으로 떨어지는 능소화를 바라 보는 시선은 작가와 작품에 따라 그 색깔을 달리한다. 죽음으로 갈라진 애달픈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붉은 핏빛이 서리고, '팜 파탈'의 요염한 이야기에 등장하면 노을 빛으로 물든다. 사찰이나 시골에 핀 능소화를 구경하는 것도 무더위와 코로나로 힘든 일상에서 힐링하며 여름나는 한가지 방법이다.

편집부장 chungham@imaeil.com

이종민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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