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는 금세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견고하던 쌍둥이 무역센터 빌딩이 힘없이 무너지고, 국방의 심장인 펜타곤까지 공습을 받았다. 2천977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사랑하는 이를 잃고 상실감과 분노에 빠졌다.
'레인 오버 미'(2007),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11) 등 9.11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상처와 후유증을 다루었다. 그러나 이번 주 개봉한 '워스'(감독 사라 콜란겔로)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그리고 있다. 당시 희생자들의 보상금을 두고 벌어지는 실화다. 제목(Worth)처럼 '목숨 값'을 '흥정'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9.11 테러가 터진 지 열흘 만에 특별위원회가 만들어진다. 피해자 보상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선의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피해자와 가족들이 소송을 벌여 기업을 파산하게 하고 국가 경제를 흔들게 할까 두려웠던 미국 의회와 정부가 선수를 친 것이다. 피해자들이 국가가 제시한 보상 기금을 받고, 소송을 포기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워스'의 원제는 '목숨 값이 얼마일까?'(What is Life Worth?)이다. 이 영화의 바탕이 된 보상기금 특별위원장이었던 변호사 케네스 파인버그의 회고록 제목이다.
'목숨 값이 얼마일까?'는 주인공 켄(마이클 키튼)의 로스쿨 강의 제목이기도 하다. 콤바인에 끼어 사망한 농부의 목숨 값을 산출하라고 학생들에게 제시한다. 학생들은 200만 달러, 300만 달러라고 얘기하고, 그 중 한 학생이 270만 달러라고 답한다. 바로 270만 달러에 합의를 선언하며 "이 과정은 늘 정답이 있고, 수치가 답이며, 그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평생을 협상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9.11 테러를 목격하고, 무보수로 특별위원장을 맡는다. 아내가 반대하자 "내가 적격"이라며 "나보다 잘 할 사람 없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단호한 벽을 만난다. 늘 해오던 대로 보험회사 공식 같은 것을 대입해 산정한 보상금을 제시했다가 피해자와 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다.
"어떻게 다를 수가 있어요. 모두 소중한 생명인데."
24개월 안에 대상자의 80%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기한이 다 되도록 진척이 없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켄은 뉴욕에 근거지를 둔 전형적인 변호사다. 돈이 가치의 척도라고 믿는다. 집에 오면 오페라 '라 왈리'의 아리아를 듣고, 사회와 국가를 위해 공헌하고 싶은 공명심도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과 반대의 정치 성향이지만, 부시의 전화에 감읍하기도 한다.
그는 피해자들의 호소에 건성으로 호응한다. 머리에는 액수와 환산표만 가득 차 있고, 가슴은 그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 그가 결정한 목숨 값이 피해자들의 공감을 얻을 리가 없다.
반대로 그의 평생 동료이자 부위원장인 카밀(에이미 라이언)과 신입사원 프리야 쿤디(수노리 라마나단)는 피해자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지장을 받을 정도. 결국 켄이 가슴을 열고 피해자들의 사연을 듣는 순간 그들의 마음도 움직인다.
남편을 잃은 아내, 연인을 잃은 남자, 자식을 잃은 부모 등 그들의 아픔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던 남편의 마지막 인사, 형을 구하려 뛰어든 동생 소방관의 죽음 등 사연들이 가슴 뭉클하게 한다.

망자의 목숨 값을 수치로 환산하려고 했던 이 프로그램의 진행 과정이 영화의 큰 줄기지만, 영화는 사건의 희생자들과 남은 자들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이를 이해하고 보듬는 데 세심한 신경을 쓴다.
9.11 테러를 다룬 영화가 지키는 선이 있다.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를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적대감이나 비판보다는 화해와 용서, 포용의 정서를 더 부각시키는 것이다.
'워스'도 빨리 사건을 잠재우고 싶은 위정자들이나, 수백억원의 목숨 값을 제시하는 월 스트리트의 금융인들에게도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켄에 대해서도 그가 변할 수 있는 여지를 두며 기다려준다. 마치 지금은 무엇도 이 슬픔보다 더 큰 것은 없다는 듯, 전대미문의 대사건 앞에 모두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듯이 말이다. 내심 조지 부시 대통령의 '뻘짓'에 대해 비판하기를 바랐지만, 그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워스'는 21일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했으며, 오는 9월 북미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2018년 '나의 작은 시인에게'로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사라 콜란겔로의 연출작이다. 나이가 들수록 '버드맨'(2015), '스포트라이트'(2016), '파운더'(2017) 등 사회성 짙은 영화에 더욱 잘 어울리는 마이클 키튼이 켄의 고뇌를 잘 연기하고, '칠드런 액트'(2019)와 '사일런스'(2019)의 스탠리 투치가 켄을 압박하는 희생자 남편으로 출연한다. 117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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