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모두의 고영희 씨

박주연
박주연 '여행자의 책' 공동대표

잘 되는 서점의 법칙이라 믿고 있지만, 우리 책방에도 '고영희 씨(고양이를 좋아하는 이들이 고양이를 가리키는 애칭 중 하나)'가 드나든다. 아침이면 뒷마당 소파에서 흰 털뭉치를 찾아내 이를 갈면서도, 저녁이면 서점 입구에서 애교를 부리는 그에게 홀려 간식을 바치게 된다.

동네에는 고영희 씨에게 끼니를 주는 이들이 시간대별로 존재하므로 어쩌다 별미가 필요할 때 외에 그는 늘 우리를 우습게 본다. 서열에서 밀릴 수 없다고 혼자 다짐하건만 막상 길에서 고영희 씨와 마주치면 손부터 공손히 모으는 나를 발견한다.

서점에 함께 있는 식구들이 귀여워하며 사진을 찍어댈 때마다 우리 동네 스타는 귀찮아하면서도 이 자세 저 자세를 취해주며 너끈히 밥값을 해낸다. 플래시가 양쪽에서 터지는 기회를 틈타 나는 우리도 '반려동물'을 키우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묻는다. 그들은 일시에 갑자기 전화가 온 척하거나 인터넷 속보를 보는 등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을 보여주며 자리를 뜬다.

나 또한 카렐 차페크의 반려동물 에세이 '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를 들춰보며 아쉬움을 달래보지만 팔공산 동화사 아래에서 자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동물 친구들이었다. 그 시절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은 '고보살'이었는데 생선도 고기도 입에 대지 않았기에 불교사상에 심취했다고 추정되는 친구였다. 반야심경 독송을 틀어줄 때마다 오디오 스피커 앞에 앞발을 모으고 엎드려 경청하던 고보살이었기에 어느 날부터는 누군가 염주를 걸어주기도 했다.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부터 고보살은 세속의 뭇 중생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내뿜게 되었다.

그런 고보살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었다. 두 번이나 중성화 수술을 했기에 매우 희박한 확률일 테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임신이 된 것이었다. 축 처진 배를 보고도 자꾸 살이 찌는 줄 여길 만큼 눈치가 없었던 우리는 어느 날 태어난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보고 단박에 아차! 하고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돈오(頓悟)'라 붙여졌다.

생명을 이었으니 비로소 속세를 벗겠다는 듯 고보살은 돈오의 젖이 떨어지자 마루 아래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고보살은 어디로 되돌아간 것일까. 이후 만난 모든 고양이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고보살이라면 윤회의 사슬을 끊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골목길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는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은 채 모두의 고양이로 살아간다. 소유하고 집착하느라 아웅다웅야옹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고영희 씨가 어쩜 그렇게 무념무상의 표정을 유지하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고영희 씨가 편안히 사는 동네야말로 안전한 마을이라는 사실이다. 동네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이들이 책 주문을 하는 틈틈이 동물 보호 사이트까지 드나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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