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는 속담이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내려온다.
베이징 자금성 담장 안에 있는 황제는 담장 밖은 물론 드넓은 중국 대륙에 산재한 지방과 괴리돼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도 서울에서 일어난 재난이나 사건은 크게 보도되지만 지방에서 일어난 대형 재난은 축소되거나 아예 무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듯이, 중국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중국에서 폭우와 홍수, 태풍 피해는 해마다 겪는 자연재해다. 땅이 워낙 넓다 보니 겪게 되는 통과의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20일 허난성 정저우시에 사흘간 내린 617㎜의 폭우는 연간 강수량에 해당하는 기록적인 규모였다. 허난성 당국이 '5천 년에 한 번 올 법한 폭우'라고 규정했을 정도의 엄청난 폭우였다.
정저우시 도심은 비에 잠겼다. 운행 중이던 지하철에 갑자기 물이 들이차서 지하철 운행이 멈췄고 500여 명의 승객이 대낮에 물속에 갇히는 초유의 재난 상황이 벌어졌다. 도심을 관통하는 1㎞가 넘는 지하차도도 5분여 만에 물에 잠겼다. 200여 대의 차량이 뒤엉켜 빠져나가지 못했다. 대형 병원도 물에 잠겼고 중국 전역을 이어 주던 사통팔달 정저우역도 제 기능을 못한 채 문을 닫았다. 그래서 허난성을 거쳐 가는 노선은 철로가 유실된 탓에 일주일째 운행을 멈춰야 했다.
허난에서 정저우시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다. 인명 피해가 58명에 달한다는 당국의 발표가 있었지만 시중에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을 정도로 민심은 흉흉하다.
그런데도 베이징은 물론, 전 중국에서 허난의 폭우와 대홍수 피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도 않고 보도도 비중 있게 하지 않은 모양이다.
지난해 장강 유역에서 대홍수가 났을 당시에는 리커창 총리가 직접 달려가 장화를 신은 채 진흙탕에 들어가는 등 이재민을 위로하는 모습까지 연출했지만 이번 정저우 폭우 사태에 대해서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관심과 배려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중국 관영 매체가 폭우 당시 재난방송을 제때 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유럽의 대홍수 사태는 크게 보도하면서도 정작 허난의 폭우 사태에 대해서는 보도조차 하지 않은 채 '나 몰라라' 한 것이다.
허난의 한 지역 매체는 지하철과 지하차도가 물에 잠긴 20일 저녁 보도에서 "갇혀 있던 정저우 지하철 승객들이 차례로 대피했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보도해 정저우 시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하철 승객 12명이 사망했고 지하차도에 갇힌 차량에서도 40여 명이 희생됐지만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정저우시의 폭우 피해가 뒤늦게 보도된 23일 중국공산당 관영 인민일보는 최고지도자 시진핑 주석의 동정을 화보 여러 장과 함께 실었다. 정저우와 허난성 인민들이 쏟아지는 폭우 피해에 속절없이 하늘을 원망하고 있을 그 시각, 시 주석은 티베트(시짱장족자치구) 라싸를 방문한 것이다. "시 주석이 21일 티베트 린즈(林芝)의 공항에 도착해 티베트 관리 및 현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 관영 매체의 보도 요지다.
2012년 최고지도자에 오른 후 처음인 이번 티베트 방문은 미국과 유럽연합 등이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와 신장(新疆) 등의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며 대중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는 와중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다분히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담장 안의 황제', 시 주석에게 허난의 폭우 사태에 대한 보고가 제대로 전달되거나 주요 매체를 통해 보도가 됐다면 티베트를 찾는 일정 대신 허난의 폭우 피해를 위로하는 일정을 짰을지도 모른다. 직접 재난 현장을 챙기지 못하더라도 리 총리라도 보내지 않았을까?
정저우시에 내리던 비는 10여 일 만에 그쳤다. 중국 매체들은 지난해 코로나19 사태로 봉쇄된 '우한 사태' 당시 '우한 힘내라!'(武汉加油!) 캠페인을 벌인 것과 마찬가지로 허난에 대해서도 재난 극복 캠페인에 나서고 있다. 허난성에서도 '허난인이여, 우리 함께 재난을 극복해 나갑시다'(河南, 咱们一起扛过去)라는 구호가 난무한다.
이번 정저우 홍수는 베이징의 황제가 얼마나 라오바이싱(老百姓)의 삶과 분리돼 있는 것인지 잘 드러내 준 계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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