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메달 획득에 관심을 두는 종목이 있다. 모든 스포츠의 입문 코스로 불리는 육상, 수영, 체조 등 기초 종목이다. 수영에서는 박태환(2008년 베이징), 체조에서는 양학선(2012년 런던)과 신재환(2020년 도쿄)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남은 종목은 마라톤을 제외한 육상이다. 마라톤에서는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대회, 황영조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각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육상 트랙·필드는 언제까지 우리나라가 올림픽에서 극복하지 못할 종목으로 남을까.
'2020 도쿄 올림픽' 육상에 걸린 금메달은 45개다. 금메달 49개가 걸린 수영에 이은 두 번째 메달밭이다. 이렇게 많은 금메달이 걸린 육상에서 한국은 마라톤을 제외하면 '노 메달'의 업적(?)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사실 육상은 메달이 아니라 올림픽 출전 티켓 확보조차 쉽지 않은 종목이다. 올림픽에서 예선 통과만 해도 대단한 성적으로 인정받는다.
도쿄 올림픽에 한국은 25개 종목에 남녀 232명의 선수를 파견하고 있다. 육상에는 남자 5명, 여자 2명이 출전하고 있다. 남자 마라톤의 오주환·심종섭, 여자 마라톤의 안슬기·최경선, 남자 경보 최병광, 남자 장대높이뛰기 진민섭, 남자 높이뛰기 우상혁 등 7명이다. 이들은 마라톤과 경보, 필드 선수로 트랙 부문 참가자는 없다. 참으로 초라한 선수 규모다.
이런 실정에서 우상혁이 큰일을 했다. 우리나라 육상의 숙원인 올림픽 메달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지난 1일 도쿄 올림픽 스타디움(신국립경기장). 우상혁은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m35를 넘어 한국 신기록을 경신하며 4위를 차지했다. 한국 육상 트랙·필드 선수가 올림픽 결선에 진출한 건,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남자 높이뛰기 이진택 이후 무려 25년 만이다.
우상혁은 한국 육상 트랙·필드를 막고 있던 '8위의 벽'도 깼다. 1996년 이진택은 예선에서 2m28을 넘어 결선에 진출했고, 결선에서는 2m29를 뛰어넘어 8위에 올랐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남자 멀리뛰기 김종일, 1988년 서울 올림픽 여자 높이뛰기 김희선도 8위에 올랐다.
한국 육상은 1996년 이후 점점 세계의 벽과 멀어졌지만, 우상혁은 힘찬 도약으로 굳게 닫혔던 세계 정상권으로 향하는 길의 문을 활짝 열었다.
우상혁은 일찍부터 주목받은 유망주였다. 그는 2013년 세계청소년육상경기선수권(18세 미만)에서 2m20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2014년 세계주니어육상경기선수권대회(20세 미만)에서는 2m24를 뛰어 3위에 올랐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수확했다. 이 메달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이진택(금메달) 이후 16년 만에 한국 남자 높이뛰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5년 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도 출전, 기대를 모았으나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이며 2m26에 그쳐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 때문이었을까. 첫 올림픽 실패를 거울삼아 그는 이번에는 주눅 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고, 항상 웃는 모습으로 박수를 유도하는 등 인상적인 경기 모습을 보였다. 높이뛰기 바를 향해 도움닫기를 하는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우상혁은 2m19, 2m24, 2m27에 이어 2m30까지 모두 1차 시기에 넘었다. 올림픽이 시작하기 전, 우상혁의 개인 최고 기록은 2m31이었다. 2m33 1차 시기에서 우상혁은 바를 건드려 실패했으나 2차 시기에서 2m33을 훌쩍 넘어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는 2m35는 1차 시기에 단숨에 넘었다. 1997년 6월 20일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 이진택이 세운 2m34를 1㎝ 넘은 한국 신기록이다. 24년 동안 멈춰 있던 한국 기록을 우상혁이 바꿔놨다. 이후 2m37에서는 1차 시기에 실패했고, 2m39로 바를 높여 2, 3차 시기에 나섰지만 아쉽게도 모두 바를 건드렸다.
시상대에 오른 선수와 우상혁의 격차는 2㎝였다. 공동 1위를 차지한 무타즈 에사 바심(카타르)과 장마르코 탬베리(이탈리아), 동메달을 차지한 막심 네다세카(벨라루스)의 기록이 모두 2m37이다.
우상혁은 이제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정조준한다. 그는 결선이 끝난 뒤 "다음 올림픽 목표는 우승이다. 가능성을 봤다. 전 할 수 있다"며 각오를 다졌다. 키 188cm의 우상혁은 이날 2m37에 실패했지만 환하게 웃었다. 그는 "높이뛰기 선수로서 자기 키의 50cm 이상은 마의 벽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2m38을 평생 목표로 잡았는데, 올림픽에서 2m37에 도전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고 꿈 같았다"고 밝혔다.
이진택의 한국 기록이 깨어질 것으로 예상한 이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은 깨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기록 경신을 통해 스포츠의 가치는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인간 승리가 등장하고 스포츠의 묘미 또한 배가된다.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 박태환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한국의 수영 금메달을 일궈냈다. 도쿄 대회 수영에서는 황선우가 한국 기록을 경신하며 박태환을 넘어설 기세를 보였다.
육상 트랙·필드는 한국 스포츠가 넘어서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도쿄 대회 우상혁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우상혁과 기대주들이 3년 후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육상의 숙원을 풀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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