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인사 뒤 건네받은 김원형(66·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씨의 명함에 그려진 초상화 일러스트는 푸근한 미소가 꽤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더 궁금증을 자아낸 것은 뒷면에 적힌 응급구조사·사회복지사·아마추어 무선사(호출부호 HL5NOH) 등 각종 자격증과 휴대전화 번호 2개였다. 설명을 듣고 나니 '봉사활동에 진짜 진심인 편'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저 나름대로 봉사를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욕심에 자격증을 하나 둘 따게 됐습니다. 요양보호사, 보육교사, 장례지도사 등등도 그런 경우이지요. 다만 아직 간호조무사 자격증이 없어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습니다. 코로나19로 의료진의 고생이 이루 말할 데 없이 커진 상황에서 힘 쓰는 일을 할 남자 간호조무사가 있으면 도움이 될 텐데 말입니다."
김 씨는 한국전력공사에서 엔지니어로 36년을 재직한 뒤 지난 2015년 정년퇴직했다. 주택·공장·빌딩 등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내선은 물론 송전·배전 등 외선 분야 업무도 두루 경험했다. 요즘에도 냉방기 사용 급증에 따른 과부하로 정전 사고가 종종 발생하지만 기술 수준이 지금만 못했던 예전에는 여름철이면 긴급출동으로 밤을 새기 일쑤였다.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십분 활용해 한전 사회봉사단의 취약계층 봉사에 늘 앞장섰던 그는 퇴직을 앞두고 받은 신체검사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암 판정이었다. 위의 60%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으며 넉 달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지금은 완치됐지만 체중은 한창 때보다 20kg이 줄었다는 게 그의 귀띔이다.
"입원해 있는 동안 온갖 생각이 들더군요. 우선 가족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봉사 다닌답시고 그동안 집안일에는 소홀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나중에는 너무 늦지 않게 암을 발견해 다행이라고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진 빚을 갚을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물론 아내는 암 환자가 무슨 봉사냐라며 극구 말렸지만요. 하하하."
'세상에 빛을, 이웃에 사랑을'이란 한전 사회봉사단 슬로건이 직장생활 동안 자긍심이었다는 그는 실제로 퇴원 이후 활동 분야를 더욱 넓혔다. 현재 가입해 있는 봉사단체가 무려 15곳에 이른다. 어린이날 등 기념일 행사 안내, 저소득층 집수리 및 연탄 배달, 어르신 자장면 대접, 장애인 야외 나들이, 시민 심폐소생술 교육 등으로 365일 내내 쉴 틈이 없다.
"되짚어 보면 취미 덕분에 봉사에 입문하게 된 셈입니다. 휴대전화가 보급되기 전인 1992년 아마추어 무선사(HAM)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격증 시험장 앞에서 응시자들에게 사비로 마련한 음료수를 나눠 드리거나 마라톤·자전거대회에서 진행을 도왔거든요. 제 콜사인을 알려드리면서 새 친구도 사귀고 HAM 저변 확대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인류의 선한 본성을 연구한 인문서 '휴먼 카인드'(Human kind)에서 네덜란드 사상가인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모든 선행은 연못에 던진 돌과 같아 사방으로 파문이 퍼진다"고 강조한다. '전염성'이 매우 커 멀리서 보기만 해도 감동을 주고, 우리의 냉소적 감정을 지우는 리셋 버튼처럼 작동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행사에는 아무리 바빠도 빠지지 않아 '꼭꼭이'란 별명을 얻은 김 씨의 생각도 그랬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회에는 봉사가 몸에 밴 분이 정말 많습니다.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헌신하는 그런 분들을 뵐 때마다 저도 용기와 희망을 얻지요.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더 나은 세상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시작합니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각급 기관·단체에서 적지 않은 표창과 감사패를 받은 그는 봉사를 주목적으로 하는 비영리 사단법인을 만드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털어놓았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평생교육 강좌를 틈나는 대로 찾아다니며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뜻 맞는 지인들과 이미 준비작업은 마쳤다며 코로나19 팬데믹이 하루 빨리 끝나 인생 2막에 보람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장년층에게 많은 봉사 기회를 드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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