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5일은 제76회 광복절이다. 대구경북을 빛낸 대표적 독립운동가를 살펴보면 왕산 허위 선생을 위시로 석주 이상룡, 김대락, 우재룡, 이육사, 이상화, 박희광 지사 등이 있지만 그중 독립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감옥에서 순국한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김동삼 독립운동가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의하면 일송 김동삼 독립운동가는 187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07년 유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 등과 함께 협동중학교(協東中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09년에는 서울 양기탁(梁起鐸)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은밀히 회합하여 독립운동 기지 설치 문제와 독립군 양성 문제를 협의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당하자 1911년 만주로 건너가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시영(李始榮)·이철영(李哲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과 더불어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재만동포의 농지 개척과 이주민의 안정책을 도모하였다. 1918년에는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에서 서일(徐一)·여준·신팔균(申八均)·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39인이 민족 대표로서 연서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1923년 1월 3일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대표로 참석, 의장에 임명되어 회의를 주재하다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자 양파를 조정, 독립운동기구를 일원화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동년 6월 3일 삼십여 개 단체의 개조파 대표와 성명을 발표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9월 24일,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고 이듬해 2월, 그를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동년 10월 10일 국무령 홍진(洪震)이 또다시 그를 국무원에 임명하였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1927년에는 길림에서 김좌진·이청천(李靑天) 등이 정의부·신민부·참의부(參議府)를 합하여 민족유일당촉진회(民族唯一黨促進會)를 조직하자, 위원장 겸 군민의회(軍民議會)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나 일본군이 만주로 계속 진출하자 동지 이원일(李源一)과 함께 북만으로 갔다가 동년 10월 초, 하얼빈(哈爾濱)의 정인호(鄭寅浩)의 집에 투숙 중 이원일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경성으로 이감된 후,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보훈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일송 김동삼 지사는 독립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였고, 대한 독립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핵심적인 인물로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는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분이나 생가 보전 및 기념관이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국가보훈처와 경상북도는 2022년엔 보훈 예산을 확보, 생가 복원 및 김동삼 지사 기념관을 설립해 보훈 콘텐츠를 개발하는 등 전 국민이 찾아올 수 있는 보훈관광 랜드마크가 되도록 보훈 전문가의 연구용역 및 중장기 활성화 방안을 수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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