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휴일이 익숙해진 지 오래다. 지난주 휴일 무료함을 달랠 겸 사문진을 다녀왔다. 해 질 무렵 노을을 보며, 70여 년 전 이곳 낙동강 가에서의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떠올렸다. 1950년 8월 대한민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지켜낸 구국의 장소에서 그동안 우리가 잊고 지냈거나 소홀히 여겨 왔던 낙동강 방어 전투와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하려 한다.
먼저 이 땅의 젊은이는 물론, 들어본 적도 와 본 적도 없었던 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유엔의 이름하에 목숨 바친 수많은 우방국들의 고귀한 희생이다. 50여 일간 낙동강 전선에서만 최소 4만5천 명에 달하는 국군과 미군 전사자가 발생했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북한군에 맞서 후퇴를 거듭하던 아군이 반격에 필요한 증원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을 소중한 젊은이들의 목숨과 바꾼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낙동강 방어선을 구상하고 이를 지켜낸 이가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전쟁 발발 18일 만에 한국전을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는 주한 미 지상군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우리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1, 2차 대전을 통해 증명된 탁월한 전략가이자 명장이었던 그는 적은 병력으로 적에 대항함에 있어 소모식 병력 투입보다는 상대의 전력, 지리적 이점 등 다양한 분석을 통해 낙동강을 연결하는 선을 최후 방어지대로 정한 뒤, 우선 적을 저지한 다음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최적의 전략을 수립했지만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는 특유의 결단력과 함께 항상 가장 위험한 전투 현장을 방문해 "후퇴란 없다. 오직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는 이른바 명령을 통해 부하들에게 용맹하고 과감한 전투 의지를 불어넣어 끝내 전세를 역전시키며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했고, 백척간두의 대한민국을 구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전투를 지휘한 지 160여 일 만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워커 장군에게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지만 그를 기리는 노력은 너무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 대구의 '캠프워커'가 그분을 지칭함을 아는 젊은이가 얼마나 될까?
세 번째는 승리를 가능케 했던 대구·경북민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투혼이다. 당시의 지역 주민들은 군을 도와 총력전을 수행했다. 계속되는 전투로 부족한 병력은 지역 학도병을 비롯한 젊은이들로 채워졌고, 4만여 명의 부상자가 대구로 후송됨에 따라 지역민들의 헌혈이 필요했다. 또한 전쟁 당시 인구 30만 명의 대구에 40만 명의 외지 피난민이 유입되면서 식량난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8월 18일부터 3일간 대구역을 중심으로 시내 곳곳에 박격포탄 수십 발이 떨어지는 불안한 전세와 난무하는 유언비어에도 불구하고 큰 동요 없이 치안이 유지되는 등 안정된 후방 지원을 통해 전승을 보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해가 바뀔수록 전쟁의 주역들이 세상을 떠나고, 점점 6·25전쟁 또한 우리들 기억에서 잊혀 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평화와 번영은 거저 얻은 게 아니라 수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자. 오늘은 경북 왜관 낙동강 변 작오산(303고지)에서 포로로 잡힌 41명의 미군이 북한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날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한 채 유유히 흐르고 있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이국 땅에서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19세 전후의 젊은 그들의 명복을 빌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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