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아도 당국의 규정을 등한시하는 일부 요정, 음식점 등에 대해서는 일반의 비난성이 비등하고 있는데 대처하여 금번 부 보건당국에서는 단안을 철두철미로 25일부터 향 5일간 특별 취체 주간을 설정하고 부내 유흥장에 대한 일제 취체를 개시하기로 되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 25일 자)
흥겹게 논다는 의미의 유흥. 일제 강점기에는 기생들로 이뤄진 권번이 대표적인 유흥장소였다. 대동권번과 달성권번 등이 대구의 이름난 기생조합이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들어오면서 유흥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바(bar)나 카바레, 댄스홀, 카페 등이 잇따라 생겼다. 당시 유흥업은 기생 작부 영업과 요리업, 불건전한 오락 영업을 다 포함했다. 업소에서는 극심한 식량난과는 아랑곳없이 환락의 딴 세상이 펼쳐졌다.
유흥업소가 늘수록 풍속을 해친다는 비판 또한 거셌다. 게다가 해방 3년이 지나도 일본식 유흥업소는 인기를 끌었다. 해방 직후부터 일제 잔재의 청산을 외치는 사회 분위기와는 달랐다. 이래저래 당국이 유흥업소 단속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요정은 접대 여성 등이 있는 유흥장소로 자리 잡았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사들의 출입도 드물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사회적 폐해의 우려가 커지자 해방 이듬해부터 요정 같은 유흥업소를 줄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미군이 주로 출입하는 카바레, 카페 등을 빼고는 영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생업과도 연관된 업소의 영업 중지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당국의 단속이 심하면 잠시 움츠렸다 다시 문을 여는 숨바꼭질을 반복했다. 경북도는 업소의 위생시설 위반을 점검해 영업허가를 취소하려 했다. 요정의 장부를 조사하여 부정 이득을 처벌하겠다는 엄포도 뒤따랐다.
유흥업소의 영업을 막아보려는 시도는 소리만 요란했다. 그러자 1947년 하반기에는 아예 유흥업을 중지시키는 법이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시행도 되기 전에 비판이 쏟아졌다. 현실과 동떨어진 보여주기식의 탁상행정이라는 지적이었다. 대구의 경우 화월, 수향원 등 9개 요정에 얽힌 인원이 2천여 명이나 되었다. 업소의 전환을 유도하는 지원이나 종사자들에 대한 마땅한 생존 대책이 없다 보니 기생이나 요정의 종업원은 손쉽게 접대부로 이동했다.
접대부는 애초 음식을 나르는 것으로 한정했으나 손님에게 술을 따라 줄 수 있게 완화했다. 손님에게 술을 따를 수 있자 종업원들의 팁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처럼 법의 경계가 모호하다 보니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업소에서 직접 노래 부르는 것을 막자 고성방가 대신 레코드판이 돌았다. 춤판 또한 여전했다. 기껏 기생 여급을 접대부로 고쳐 부르고 영업시간이 밤 10시로 1시간 줄어든 것이 성과라는 비아냥대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유흥업 금지령이 시행되고 다음 해 보건부는 요정을 살리고 기생제도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입장을 바꿨다. 유흥업소들이 간판과 이름을 바꿔 같은 영업을 해도 단속이 힘들고, 업소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을 놓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사회변동기마다 위정자들은 유흥업을 입맛에 따라 재단했다. 때로는 유흥업의 단속을 사회 기강을 세우는 일로 둔갑시켰다. 권력자인 자신들이 즐겨 찾는 큰 손님이었는데도 말이다.
권력 놀음의 공간으로 유흥업소는 안성맞춤이었다. 은밀하게 누렸던 짬짜미가 훗날 세상에 드러나 제 발등을 찍을 수 있다는 걱정은 유흥의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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