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싱크홀

영화 '싱크홀'의 한 장면
영화 '싱크홀'의 한 장면

11년 만에 장만한 내 집이 땅 속으로 꺼진다면?

'싱크홀'(감독 김지훈)은 자연재해에 맞서는 이들의 고군분투를 한국적인 정서로 그려낸 어드벤처 영화다. 108층 초고층 빌딩의 화재 재난영화 '타워'(2012)의 김지훈 감독이 연출하고, 김성균, 차승원, 이광수 등 친근한 이미지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

재난 탈출을 소재로 하고 있어 빌딩 탈출 영화 '엑시트'와 많은 부분이 닮았다. 이웃사촌이라 할까. '엑시트'는 고층, '싱크홀'은 지하에서 벌어지는 재난이지만, 둘은 '한국적 재난 탈출'이라는 같은 플롯, 같은 피를 나누고 있다. 어떤 닮은 점이 있을까.

먼저 소시민의 생활형 재난극복기라는 점이 유사하다. '엑시트'가 온 가족이 참석한 어머니의 칠순잔치에 벌어진 독가스 재난이라면 '싱크홀'은 소시민의 영원한 꿈, '내집 마련'이 실현된 집들이날 벌어진 땅꺼짐 재난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드디어 11년 만에 내 집을 마련한 동원(김성균). 비록 집이 좀 기울고, 땅이 갈라지긴 했지만, 이런 대견한 일이 있을까. 동원의 집들이에 인턴사원 은주(김혜준)까지 포함한 부하직원들이 모여 축하해준다. 김대리(이광수)는 "왜 아파트를 사지 않았느냐?"고 묻지만 동원은 "빌라면 어때? 이사 다닐 일 없이 가족과 알콩달콩 살면 되는 거지"라고 답한다.

그동안 재난영화의 주인공은 재난이었다. 그 재난이 얼마나 거대하고 위험한지에 치중했다. 그러나 '엑시트'와 '싱크홀'의 재난은 소시민의 극복 대상이다. 우리 이웃, 가족이 위기를 극복하고 따스한 정을 확인하는 과정의 소품일 뿐이다.

또 하나는 '하찮은' 인물의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캐릭터 설정이다. '엑시트'의 용남(조정석)은 대학 졸업 후 몇 년째 취업 실패로 눈칫밥만 먹고 있다. 심지어 조카도 부끄러워하는 삼촌이다.

'싱크홀'에서는 만수(차승원)가 바로 그런 캐릭터다. 그는 사진관을 운영하지만, 헬스장 매니저, 대리운전 등을 겸하면서 사사건건 동원과 부딪친다. 이사 오는 날부터 주차 시비에 휘말리면서 만수는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쓸데없는' 인간형이 된다. 그러나 빌라가 통째로 500m 지하로 꺼지면서 그는 영웅적인 이웃으로 변신한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웃들을 구하는 위대한 인간형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말단 여사원 은주 또한 현실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러나 재난 상황이 되면서 그녀의 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이 같은 설정은 '우리 모두가 영웅'이라는 주제의식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영화 '싱크홀'의 한 장면
영화 '싱크홀'의 한 장면

한국적인 소품과 소재로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 것도 유사하다. '엑시트'에서는 쓰레기 종량제 봉투로 온 몸을 감싸고, 아령을 던져 탈출을 시도하고, 노래방 기계로 도움을 청하는 생활형 설정들로 재미를 선사했다.

'싱크홀'은 집이라는 소재 자체가 이미 관객의 초관심 소재다. 은행 대출이 얼마며, 보증금 얼마에 월세가 얼마라는 빌라의 제원이 관객의 귀에 쏙쏙 들어온다. 그들에게 빌라 한 채가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인지, 이어지는 재난이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지 알려주는 정보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바쳐 마련한 소중한 부동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싱크홀인 것이다. 여기에 드론이나 김장 비닐, 노란 물탱크, 층간 담배연기 분쟁 등 한국형 소재들이 울고 웃는 코믹의 재치를 더한다.

'엑시트'에서 재미난 에피소드는 옥상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SOS의 모르스 부호를 외치는 장면이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모두의 협동이 한 장면에 녹아들었다. '싱크홀'에서도 모두가 합심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추락하는 동원을 구하기 위해 연약한 인턴사원 은주의 고무호스 액션과 줄에 걸린 물탱크를 빼내기 위해 모두가 노력하는 장면 등은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가 된 그들의 간절함이고, 이것은 소시민의 위대함으로 연결된다. 여기에 자식을 구하기 위한 아빠의 필사적인 분투 등 가족애는 이제 한국형 재난영화의 고정 레퍼토리가 됐다.

영화 '싱크홀'의 한 장면
영화 '싱크홀'의 한 장면

'싱크홀'은 개봉 첫 주 박스 오피스 정상을 지키며 누적 관객 110만 명을 넘겼다.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와 함께 한국영화 흥행에 파란불을 켰다. 여기에 이번 주 황정민의 '인질'까지 가세하면서 모처럼만에 한국영화 흥행에 기대감을 불어넣고 있다. 코로나19만 아니었으면 1천만 관객을 넘볼 영화들인데, 그래서 이놈의 역병이 더욱 야속하다.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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