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어느 흔한 문학 모임

박주연
박주연 '여행자의 책' 공동대표

매달 진행한 책 모임이 있다. 4년째다. 세계 각국의 문학작품과 그 나라 맥주를 곁들이는 형식 덕분인지 호응도 얻었다. 가령 체코 작가 카프카나 쿤데라의 글을 읽는 날이면 자연히 필스너 우르켈을 마시고, 스티븐 킹과 마크 트웨인을 만날 때면 미국 맥주 버드와이저를 곁들이는 것이다.

쉽지 않았다. 작품을 발췌하고 작가를 공부해가는 것보다 더 힘든 건 매달 직접 맥주를 사러 가는 일이었다. 그달 공부하는 작가의 나라 맥주를 사러 동네 대형할인점에 두 번 걸음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열 곳 넘게 전화를 돌린 끝에 대구 경계선까지 가서 맥주를 사 온 적도 있다. 분명, 문학 모임인데 말이다.

날짜는 왜 그리 자주 돌아오는지 버둥대던 어느 날 꾀를 냈다. 3개월 치를 미리 사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호기롭게 마트에 들어가 대형카트를 몰았다. 아일랜드의 베케트, 프랑스의 카뮈, 중국의 루쉰 순서였다. 기네스, 블랑1664, 칭따오를 상자째로 쌓아 에스컬레이터를 향하는데 어느 중년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남편은 얼른 카트를 훑어보는 것이 술의 방대함과 다양함에 놀라는 눈치였다. 아내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뭐 하는 사람인가 추측하는 듯했다.

그들과 막 스쳐 지나갈 무렵 방금 그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으, 저래 살아야 되는데…." 무슨 뜻일까. 위 문장에서 '저래'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1) 인생 뭐 있겠냐, 술이나 마시자 (2) 눈치 볼 것 없이 나도 박스떼기로 사놓을까? (3) 우리 집사람도 술꾼이면 좋겠다.

"아니에요, 정말 문학모임이에요!"라고 말하기도 이상해서 나는 끝내 뒤돌아볼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이 모임의 이름인 '세계 문학 세계 맥주'는 '세문맥'으로 불리게 되었다. 나는 이 줄임말에 자동 띄어쓰기를 하여 '세 문맥'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마지막 회차만을 앞둔 지금, 자연히 이 모임의 세 가지 문맥에 대해 생각 중이다.

첫째, 이 문학모임은 여행의 성격을 띠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느낌으로 러시아에서 출발하여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까지 섭렵한 뒤 다시 러시아에 도착하기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둘째, 소수를 지향했다. 많지 않은 마니아가 이 모임을 기다려주었고, 각 작가의 가장 덜 알려진 작품을 준비해 갔다. 어떤 소설은 국내에서 우리만 읽고 토론하는 게 아닐까 싶어 쉽게 흥분되기도 했다. 셋째, 이 모임의 목적은 취하는 것이었다. 동네서점에 둘러앉아 '책맥'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취함의 연대를 갖추었다. 한창때는 전국 작은 책방들에 신문을 만들어 보내며 우리가 취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렇게 열성을 쏟던 과거의 내가 낯설어진 지금, 나는 앞으로 다른 어떤 책 모임을 열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다. 그리고 매달 마지막 목요일 저녁, 잊지 않고 작은 책방의 문을 열고 들어오던 참가자들을 조용히 부러워한다. "크으, 저래 살아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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