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습도 다소 높음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대한민국에 고봉수라는 이름의 감독이 있다.

4명의 남자들이 4중창 대회 참가를 준비하는 '델타 보이즈'(2016), 고교생 레슬러들의 고군분투기 '튼튼이의 모험'(2017)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영화들을 연출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는 묘한 마성이 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 코믹한 요소들을 포착해 스크린에 펼쳐놓는데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능청맞아 박장대소하게 한다. 캐릭터들의 삶은 비루하지만, 태도는 진지하고 그들의 목표는 명확하지만 늘 성공의 언저리에서 쓰린 맛을 본다.

그의 영화는 스토리보다 캐릭터들의 향연이다. 고개만 돌리면 얼굴이 마주칠 만한 캐릭터들이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또 그의 영화에는 고봉수만의 표식이 강하다. 상투성이나 전형성이 없다. 독특한 상황묘사와 웃음은 고봉수 영화의 전매특허다.

그는 돈만 모이면 영화를 찍는다. 허드렛일도 하면서 돈을 모은다. '사면조가', '쥐포', '홀리테러' 등 단편영화도 많이 찍었다. 그리고 이제 한국 영화판에 '일가'를 이뤘다. 그의 영화에만 출연하는 배우들이 있다. 김충길, 백승환, 신민재 등은 이제 '고봉수 사단'이란 패밀리 네임을 가지고 있다. 대단히 우정 있는 배우들이고, 진정성이 넘치는 배우들이다.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그들이 함께 만든 신작 '습도 다소 높음'이 1일 개봉했다.

한 영화감독의 GV(관객과의 대화)가 있던 날 벌어진 일을 그린 코미디다. 습도가 다소 높다는 일기예보는 '짜증 만발'의 예고다.

낭만극장은 오늘도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더운데 습도까지 높아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다. 자금난으로 전기 사용료라도 아낄 속셈이지만 겉으로는 방역을 핑계 댄다. 여기에서 영화 '젊은 그대'의 시사회가 열린다. 과연 시사회가 제대로 진행될까.

고봉수 영화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생동감이 넘친다. 캐릭터 각자에게 서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연과 조연의 경계도 약하다. 모든 캐릭터가 주연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낭만극장의 찰스(김충길)는 충직한 알바생이다. 매표, 매점, 코로나 방역까지 도맡아 한다. 그래서 사장(신민재)에게 알바비를 올려달라고 말하지만, 사장은 뺀질이라 이리저리 피한다. 오히려 사장은 언제라도 극장문을 닫을 것이라며 엄포를 놓는다. 이 둘이 낭만극장에 포진된 인물이다.

오늘 이곳에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짜증 유발 캐릭터들이다. 먼저 영화평론가(전찬일)의 등장이다. 그는 GV 사회를 보러왔는데, 음료수 하나 주지 않는다고 찰스에게 타박을 준다. 얼마하지 않는 음료수마저 제 돈으로 사 먹기 싫어하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지식인이다. '젊은 그대'의 감독(이희준) 또한 마찬가지다. 개인정보에 민감하다면서 방문자 기록을 하지 않으려고 찰스와 마찰을 빚는다. 자신만의 허위의식에 매여 있는 예술가를 비꼬는 것이다.

이외에 시골에서 형들까지 축하하러 왔지만, 영화에서 얼굴이 단 한 컷도 나오지 않는 무명 배우 승환(백승환), 결혼을 앞둔 여자 친구에게 타박을 당하면서도 철저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주는 영화 '젊은 그대'의 주연인 주환(고주환) 등 고온다습(?)한 캐릭터들을 통해 짜증이 만발하는 우리 사회를 우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습도 다소 높음'은 코로나19를 정면으로 다룬 첫 영화다. 체온 체크와 방문자 기록, 마스크 착용 등 우리 생활 속에 파고든 답답한 상황들을 영화 속에 십분 녹여 넣어 캐릭터를 묘사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생활밀착형 코미디를 그려온 고봉수 영화다운 설정이다.

고봉수 영화는 코믹하지만 페이소스 또한 짙은 여운으로 남게 한다. 이 영화에서는 독립영화인들의 고독한 분투를 잘 느끼게 해준다. 연기를 했지만, 한 번도 얼굴이 나오지 않은 무명배우는 감독에게 화를 내지도 못한다. 오히려 형들이 가져온 선물을 주면서 "다음에 또 불러주시기를" 간청한다. 비굴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무명배우의 비애가 잘 드러난다.

고봉수 영화에는 늘 그의 사단 배우들만 등장했는데, 새로운 인물이 둘 있다. 배우 이희준과 영화평론가 전찬일이다.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한 장면

이희준은 '남산의 부장들', '1987' 등으로 주가가 높아진 배우다. 그가 고봉수 영화에 우정 출연했다. 고봉수 영화의 독특함을 안 배우 이병헌의 조언으로 기꺼이 출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술혼에 심취한 영화감독의 면모를 잘 연기한다. 어려운 영화 용어를 쓰면서 자기 영화를 변호하는 모습이 꽤 진지하면서도 엉뚱해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평론가 전찬일 역시 걸작 영화를 거론하면서 현학적인 체하는 평론가의 모습을 연기자 뺨칠 정도로 잘 소화한다.

'습도 다소 높음'은 색다른 맛을 선사하는 저예산 영화다. 거대 제작비를 들인 영화가 아니지만, 배우들의 호연과 감독의 진정성이 조화롭게 뭉쳐진 영화다. 77분. 15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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