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귀에 자연스럽게 들리는 얘기가 있다. 아내 등 가족이 퍼다 나르는 주위 소식이다. 이 뉴스는 신뢰도가 높지 않지만, 속보성이 있으며 사회 현상을 반영한다. 여성들의 수다가 SNS 시대를 맞아 여론 형성의 큰 축이 되고 있음은 모두 주지하는 일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집에서 전해지는 뉴스에 좋은 소식이 별로 없지만 돋보이는 게 하나 있다. 누구 집의 누가 공무원이 됐다는 소식이다.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수십만 명이나 되고 경쟁률이 치열한 현실에서 정말 기쁜 뉴스다. 반면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했거나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사라진 것 같다.
"공무원 됐다"는 소식을 짚어 보니 그 수가 꽤 된다. 남녀 조카 둘이 있고 친구나 이웃의 자식들도 여럿이다. 다수가 여러 번 낙방을 맛본 끝에 영광을 안았다. 이들은 모두 효자가 된 셈이다. 합격자 부모의 자식 자랑은 정부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공무원이 된 당사자들의 솔직한 얘기는 개운찮은 뒷맛을 남긴다. 열심히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쟁해서 합격했다기보다 운이 좋았다는 얘기가 주를 이룬다. 여러 번 떨어져서 포기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한 번 더 응시했는데, 모집인원이 늘어난 덕분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물론 시험준비를 잘한 덕분이겠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공무원 증원 공약이 밑바탕이 됐음을 반영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마지막 해인 내년 중앙정부 공무원 수가 75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조직관리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말 문재인 정부의 국가직 공무원 정원은 73만5천909명으로, 박근혜 정부 말(63만1천380명)과 비교하면 10만4천529명이 늘었다. 여기에 올해 8천345명과 내년 충원 예정인 5천818명을 더하면 내년 공무원 수는 75만72명이 된다. 문재인 정부 들어 5년간 약 12만 명이 늘어난 수치이지만, 5년간 공무원 17만4천 명을 증원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공약에는 미치지 못한다. 올해와 내년에 예정대로 공무원을 뽑으면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9년간 늘어난 공무원의 2.2배가 현 정부 임기 중 늘어난다고 한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1일 내년 중앙부처 국가공무원을 5천818명 충원하는 정부안을 발표했다. 내년 충원될 인원의 최종 규모는 국회 심의를 거쳐 확정된다. 내년 충원되는 공무원은 경찰과 해양경찰 2천508명, 국공립 교원 2천120명, 생활·안전 분야 공무원 1천190명 등이다.
지방공무원은 지자체와 협의 후 연말까지 충원 규모를 확정하게 된다. 주로 근무환경이 열악한 소방관, 복지 수요 급증에 대처하기 위한 사회복지공무원 등을 중점 충원할 계획이다. 인사혁신처가 중앙, 지방을 합해 집계하는 공무원 수는 내년에 12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재인 정부의 파격적인 공무원 충원은 공무원을 배출한 가족 등 국민에게 큰 기쁨을 주지만 국가적인 부작용 또한 만만찮다. 우리나라 주민등록 인구가 지난해부터 줄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래 세대에게 큰 짐이 될 것이란 지적이다. 공무원 정원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인건비 상승이 국민의 세금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공무원 수가 급증하면서 내년 정부 공무원 인건비 예산은 41조3천억원으로 편성됐다. 사상 처음으로 40조원을 넘어서게 된다. 이는 올해 40조2천억원 보다 1조1천억원(2.7%) 증가한 것으로 현 정부 첫해보다 23.7%나 늘었다. 정부는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민간 고용시장 상황 등을 고려해 내년 예산안에 공무원 임금 인상률을 1.4%로 반영하고 고위공무원단 임금을 4년 연속 동결했으나, 공무원 수 자체가 늘어난 영향으로 인건비가 급증했다.
정년퇴임 후 공무원이 받을 연금의 재원은 이미 고갈돼 매년 예산에서 수조원씩 빠져나가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공무원연금 적자를 메꾸기 위해 내년 4조1천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이는 공무원연금 적자를 세금으로 보전하기 시작한 2001년 이후 역대 최대 규모다.
공무원연금법에 따라 정부는 2001년부터 세금으로 공무원연금 적자를 보전하고 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1∼2025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내년 공무원연금 재정수지는 3조730억원 적자가 예상된다. 공무원연금의 적자 규모는 지난해 4조7천709억원, 올해 4조1천839억원에 이른다. 공무원연금 재정의 적자가 커지면서 정부 보전액 규모는 2001년 599억원에서 2015년 3조원으로 늘었다. 2016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2조원대의 세금이 들어갔다.
공무원연금 보전액이 느는 이유는 공무원 퇴직자와 연금 수급자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내년도 공무원연금 수급자는 60만6천782명으로 올해 56만2천342명보다 4만여 명 늘어난다.
지난해 7월 국회예산정책처가 발표한 '4대 공적연금 장기 재정전망'에 따르면 공무원연금 수급자(퇴직연금+유족연금)는 지난해 53만2천 명에서 2060년엔 갑절이 넘는 106만5천 명으로 불어난다. 이에 따른 공무원연금 적자 규모는 정부의 보전액 등을 포함해도 2020년 2조1천억원에서 2060년 21조4천억원으로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무원 증원은 나라 살림도 적자투성이로 몰아가고 있다. 2021∼2025년 국가재정운용계획과 국가채무관리계획에 따르면 올해 말 국가채무 전망치 965조9천억원 중 적자성 채무는 63.1%인 609조9천억원이다. 국가채무는 적자성, 금융성으로 나뉘는데, 적자성 채무는 국민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 금융성 채무는 융자금(국민주택기금)이나 외화자산(외국환평형기금) 등 대응 자산이 있어 자체 상환이 가능하다.
적자성 채무는 내년 686조원, 2023년 766조2천억원, 2024년 854조7천억원으로 늘어난 뒤 2025년에는 900조원을 돌파해 953조3천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국가채무 중 적자성 채무가 차지하는 비중도 올해 63.1%에서 내년 64.2%, 2023년 65.2%, 2024년 66.2%, 2025년 67.7%로 상승한다.
이런 실정이면 나라 살림이 파탄 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늘린 공무원 수를 줄이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2010년대 초 정부가 파산 지경에 이르면서 대규모 공무원 감축을 불러온 남유럽의 재정위기 사태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준인데 늘어나는 은퇴 공무원의 연금을 계속 줄어드는 청년층 경제활동인구가 세금을 더 내서 메워야 하는 실정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이를 모른다고 할 것인가. 국가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공무원 증원은 청년층에게 오늘의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그들의 장래를 어둡게 할 것이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우원식 "최상목, 마은혁 즉시 임명하라…국회 권한 침해 이유 밝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