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멋대로 그림읽기] 황옥희 작 'in my time'

2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0년

황옥희 작 'in my time' 2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0년

몇 해 전 신년특집을 취재하기 위해 월정사, 상원사, 적멸보궁을 거쳐 강원도 오대산 꼭대기에 오른 적이 있다. 정상에 서는 순간, 눈 내린 태백산맥의 준령들이 내닫는 광활한 공간에 압도됐다. 짙은 갈색의 능선과 하얀 눈에 덮인 골들의 풍경은 형언할 수 없는 대자연의 호연지기를 발산하고 있었고, 그 장관을 본 나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그리고 그때 그 공간에서 느낀 망아(忘我)의 한 컷은 뇌리 속에 지워지지 않는 최고의 풍경으로 남아있다.

황옥희 작 'in my time'은 바로 그 최고의 풍경을 기억 속에서 소환시켰다.

시(詩)가 시간 예술이라면 그림은 공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황옥희는 과감한 무채색의 색감과 힘찬 붓 터치로 드러낸 험준한 산맥과 화면 곳곳 긁어내린 듯한 자국과 물성(物性)의 흔적을 통해 한없는 적막의 공간을 캔버스에 옮겨놓았다.

화면 저 너머 심원(深遠)의 공간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시각(視覺)은 공간적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저 너머의 세상을 엿보려면 시각에 사유(思惟)가 힘을 보태야 한다.

작품에서 보이는 더 없이 깊고 어두운 산, 검정의 숲은 한없이 고요하다. 너무 고요해서 또한 슬프다. 슬픔은 통곡보다 소리 죽여 흐느끼는 숨소리에서 절정에 이르며 그 이면에는 슬픔을 이기기 위한 단단하고 의연한 감정이 내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작품에 임한 작가적인 사유의 단초를 들어보자. "현재의 세상은 이미지나 환영이 넘쳐난다. 시각과 청각에 의존한 모든 세계는 헛것이다. 넘치는 헛것들의 쓰나미 속에서 나는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고 하는가? 컴퓨터의 출현과 비약적 기술은 모니터 밖의 세상까지도 실체가 아닌 이미지의 환영으로 물들이고 있다."

실재가 더 이상 실체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이미지와 환영으로 여겨진다면, 우리네 감각의 부족을 탓해야 하나, 아니면 인간의 인식 체계가 원래 그러함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황옥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투박하고 거친 색을 쓰고 과감한 구성으로 익숙한 현실의 자연처럼 화면을 구축했으나 실제로는 작가의 기억 속 쌓인 시간과 이제는 낯설어진 억눌린 욕망을 캔버스에 그렸다. 화면 속에서 작가적 욕망을 상징하는 건 한겨울 앙상한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는, 긁어내린 듯한 자국이다. 이마저 화면에 없었다면 그림은 너무 삭막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이미지가 범람하는 세상일지라도 자기본질의 정체성마저 환영으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옥을 품은 바위가 있는 산에서는 광채가 나고, 진주를 품은 물살이 흐르는 하천은 수려하기 그지없다'는 중국 서진 때 문인 육기(陸機)의 말처럼 현실과 비현실, 나와 타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작가는 헛것의 껍질을 벗기고 마지막에 남는 존재와 욕망의 고갱이를 붓질과 무채색의 색감, 긁힘이라는 조형적인 화법(畫法) 속에 몰래 감추어 놓았다.

그런 연후에 작가는 되묻는다. "내 작품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어주세요"하고 말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 한 가지 아쉬움은 화면 상단에 작게나마 하늘의 공간을 그려넣었다면 준령의 호연지기가 창공으로 뻗쳐나가는 기(氣)의 세기가 더욱 도드라졌을 것이고 전체 화면이 지닌 기세 또한 더 세차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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