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코로나가 끝나면 가고 싶은 그곳] 남아공 '블루 트레인'

남아프리카 영혼의 창에서 '대륙의 민낯' 느긋하게 바라본다
CNN 선정 가장 럭셔리한 특급열차, 30시간 동안 1600km 천천히 달려

남아프리카 영혼의 창, 블루 트레인
남아프리카 영혼의 창, 블루 트레인

킬리만자로는 높이 5,895미터, 눈에 뒤덮인 산으로 아프리카대륙의 최고봉이라 한다.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 말로 '누가에 누가이' 즉, 신의 집이라 불리는데 이 봉우리 가까이에는 말라 얼어붙은 한 마리 표범의 시체가 놓여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를 아프리카로 이끈 것은 바로 이 하드 보일드한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 첫 문장과 흑백TV 『타잔』에서부터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 에 나온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워 '토인 문명'의 다른 축으로 대조되던 아프리카횡단열차였다.

일찌감치 스스로를 지극한 토착형이라 단정 짓고 내 피 속엔 역마(驛馬)의 요소 따윈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20여 년에 걸쳐 인도의 광궤열차, 베이징에서 시안까지의 침대열차, 시베리아 횡단열차 그리고 일본의 신칸센 등 그동안 타본 많은 나라들의 침대차까지 열거해보니 그 말이 참으로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깨끗이 나는 '여행자'로 스스로를 인정하기로 했다.

블루트레인 객실
블루트레인 객실

블루 트레인은 1923년 유니언 리미티드와 유니언 익스프레스로 운행이 시작되어 1933년에 식당차 등의 시설을 갖춘 고급 열차로 도입된 후 1939년 에어컨 객차를 도입하고 외관의 스틸 소재와 청색 도장(塗裝)을 해 정식으로 '블루 트레인(The Blue Train)'으로 명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운행을 중지, 종전 후 1946년 재운행되었다.

2017년 여름, 나는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블루 트레인을 탔다. 19세기 유럽의 살롱을 옮겨놓은 것 같은 전용 대합실에서 웰컴 쥬스와 케이크를 먹으며 나는 잠시 타잔의 연인 제인 또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카렌 블릭센을 떠올렸다. 영화가 시작되면 나른한 목소리로 메릴 스트립이 읊던 대사, '나는 아프리카의 느공 산 기슭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산간지대의 북쪽으로 25마일 지점에 적도가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농장은 해발 2천미터 높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낮에는 마치 바로 태양의 지척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지만, 오후와 저녁나절이 되면 신선했고 밤이 되면 추위를 느끼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이로비 교외에 있는 그녀의 집에 들렀을 때 고요히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과 오래되고 낡은 타자기도 떠올렸다.

블루 트레인역
블루 트레인역

출발 30분 전, 짐은 이미 '버틀러'로 칭하는 승무원들이 열차에 미리 실어 놓았다. 회사 관계자가 앞에 나와 케이프타운에서 프리토리아까지 1,600㎞를 30시간 동안 천천히 달리며, 8량의 열차에 탑승객은 최대 54명, 승무원은 25명, 객차마다 3개 또는 4개의 객실이 있다며 각 객차 전담 버틀러들을 소개했다. 한 사람씩 호명될 때마다 베이지색 유니폼 차림의 아프리칸들이 수줍게 웃으며 그날의 탑승객들을 향해 인사한다.

블루 트레인의 짙푸른 차체 바탕엔 금빛 'B' 로고가 선명했다.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남아프리카 영혼의 창'이란 수사가 왠지 모르게 애틋했지만 곧 타잔이 밀림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 도움을 청하며 동물들을 부르는 소리 '아~아아아아아~'처럼 내 속에선 기쁨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마치 마사이족들과 함께 제자리에서 높이 뛰어오르며 질렀던 그 환호성 같은.

승무원이 안내해준 길이 4m, 너비 2m인 객실은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통유리 창이 있었다. 창 아래 놓인 탁자에는 꽃병과 푸른 물병이, 푹신한 소파는 밤에 승무원이 마술이라도 부린 듯 침대로 바꿔주었다. 룸서비스는 물론 언제든지 가능하다며 객실 전화기로 부탁하면 된다고 했다.

블루 트레인 레스토랑
블루 트레인 레스토랑

블루 트레인의 선로는 남아공의 주요 철로 중 하나이며 1869년 킴벌리에서 발견된 다이아몬드를 해안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부설됐다. 카루국립공원의 초원을 가로지르며, 블루 트레인뿐 아니라 '트랜스 카루 열차'도 이 선로를 이용한다. 맑은 창 너머로 흐릿한 아프리카의 태양과 거대한 포도밭 그리고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초원들이 휙휙 지나갔다. 이따금 케냐에서 사파리카를 타며 보았던 가젤이나 임팔라가 뛰어다녔지만 마을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화물열차가 지나갔다.

카펫이 깔린 긴 복도 한가운데쯤 위치한 빅토리아풍 가구와 가죽 장정의 책들이 꽂혀 있는 클럽라운지에는 미국 영화에서처럼 시가와 위스키잔을 든 노인들이 포커를 하고 있었다. 셜록 홈스나 포와르탐정 아니면 포그의 현현일까. 블루 트레인이 지향하는 테마 '타협할 수 없는 사치스러움(Uncompromising Luxury)'을 구현하며 제국의 옛 영광이라도 그리워하려는 듯 보였다. 서빙하던 승무원들이 지나가며 나를 향해 눈을 찡긋거린다.

문득 우기(雨期)에 든 세렝게티 대신 마사이라마 초원에서 기구를 타고 내린 초원의 식탁이 떠올랐다. 땅 가까이 닿을 때까지 눈에 들어오던 누 떼와 기린, 코끼리, 얼룩말 무리의 모습에 가슴 벅차하며 기구에서 내린 초원에는 눈처럼 흰 식탁보를 덮은 테이블에 싱싱한 과일과 아침식사, 샴페인을 준비해두고 영국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 제국의 후손들이라고 했다.

블루 트레인 라운지
블루 트레인 라운지

블루 트레인의 24시간 술과 음료, 스낵을 즐길 수 있는 바에서 꼬냑을 마시고 풍광이 더욱 잘 보이도록 맨 끝에 삼면창으로 된 휴게 객실 소파에 푹 파묻혀 경쾌한 클래식을 들으며 아프리카의 민낯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오늘 누리는 이 호사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일생에 몇 번 정도 받을 수 있는 선물이야. 혼자 생각했다.

블루 트레인에서는 세 번의 식사를 했는데 낭만적인 분위기의 레스토랑 식탁엔 늘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은식기와 크리스털 와인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디너에는 성장(盛裝)이 필수여서 실크 넥타이와 칵테일 드레스를 입은 신사 숙녀들이 가득했고 승무원들은 검은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말 그대로 블루 트레인 안에서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튿날 새벽 침대에 누워 객실의 커다란 창으로 떠오르는 황금빛 태양을 바라보면서 또 남작부인이자 작가였던 카렌 블릭센을 떠올렸다. '지금 내가 아프리카에서 보냈던 생활은 되돌아보면 급하고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정적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처럼 살았던 삶이라고 묘사할 수 있다. 나는 그때 그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블루 트레인에서의 마지막 점심 식사를 하며 탑승객들은 삼삼오오 샴페인 잔을 채워 '이 빛나는 순간'을 위해 건배했다.

짐을 챙기기 위해 객실로 돌아오자 테이블에는 CN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럭셔리한 특급 열차답게 역시 금빛 'B' 로고가 새겨진 탑승 기념품인 작은 탁상시계와 영문 이니셜을 새긴 블루 트레인 탑승확인서가 놓여 있었다. 열차는 프레토리아역을 향해 천천히 들어서고 있었다.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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