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밤의 여행자들'로 동양인 최초로 영국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받은 윤고은 작가가 장편 '도서관 런웨이'를 내놨다. 이 소설은 도서관에서 패션쇼를 하거나 웨딩마치를 올리는 내용으로 상상하기 좋은 제목이다. 순백색의 양장판 커버다. 앙드레김 패션쇼, 웨딩드레스가 동시에 떠오른 것도 어색하지 않다.
소설은 도서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도서관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어 소셜미디어를 도배해온 오안나의 이력이 소설의 도입이다. 남편 신정우를 만난 곳도 여행 중 들른 캐나다의 한 도서관이었다.
순탄하게 오안나의 결혼과 이후의 삶이 소설의 중심축으로 놓이는가 싶더니 이야기는 곧 안나의 친구, 이유리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안나가 잠수를 탄 뒤 안나의 행적을 쫓는 유리의 동선으로 소설은 본궤도에 오른다.
안나는 잠수에 들어가기 전 단서를 남긴다. '지속가능한 결혼 생활을 위한 지침서'라는 책이다. 저자는 'A.S.', 출판사는 '손해보'다. 저자와 출판사가 뭔가 어색하다 싶다. 일반적인 책이 아니다. A.S손해보험에서 나온 결혼안심보험 약관이다. 매달 최소 5만900원 납부, 20년 만기, 비혼일 경우 130%의 만기 환급을 조건으로 내건다. 결혼을 해도 페이백 약관이 있다. 2012년 등장해 2018년 신규가입이 중단된 이 보험의 정체는 과연 뭘까. 그리고 안나의 잠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반도네온이 연상될 만큼 두꺼운 683쪽짜리 양장본이다. 소설 '도서관 런웨이'의 흐름에 근간이 되는 책이다. 약관임에도 수상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1조 1항 어쩌고저쩌고"로 시작하지 않는다. K라는 미혼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숫제 소설 작품이다. 무려 15가지 챕터로 나뉜다. '명복을 빕니다'에서 시작해 '예단예물', '신랑신부는 수업을 받지 않는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결혼은 모험이 아니라 보험' 등등 자세하게 소제목이 붙었다. 이중에서 주요하게 소개되는 건 '예단예물' 편이다.

K가 결혼안심보험에 가입한 오빠 부부의 페이백 과정을 옆에서 살펴보는 내용이다. 지속 가능한 결혼생활에 합리적인 소비라면 보험사의 페이백 대상이 된다. 새 식구가 온다고 9년 된 냉장고를 바꿨다면 페이백 대상일까. 아니다. 기분같은 건 보험사의 페이백 영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반상기는 어떨까. 신랑의 부모님 봉양의 의미가 강하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된다. 물론 시댁, 친정 모두 샀다면 대상이 된다. 엉뚱하게도 엉겅퀴골드라는 숙취해소 음료는 페이백 대상에 포함된다. 가족의 유대감 고취에 필요했던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보험 약관이 이야기로, 구체적으로 제시되니 소설 속의 소설처럼 보인다. 핍진함이 사뭇 진해 문학성마저 느껴지는 약관이다. 도서관이 '지속가능한 결혼 생활을 위한 지침서'라는 제목을 부여해 '결혼' 코너에 버젓이 꽂아둔 까닭이었다.
이쯤 되면 고객이 알기 쉽게 개별적 상황에 맞는 스토리가 필요할 것이라는 짐작도 무리는 아니다. MZ세대의 문법을 겨냥해 SNS 문체로 약관을 대거 개정하겠다는 목소리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소설가들에게 블루오션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이건 윤고은 작가의 노림수인지도 모른다. 보험업체들이 앞다퉈 소설가들을 채용하는 빅픽처같은 거 말이다.

어쨌거나 그 책의 본질은 보험사의 약관이다. "세상에 어찌 그런 상품이 있겠느냐" 싶지만 보험상품 개발 발자취를 보면 그 말도 함부로 못한다. 1999년에는 왕따보험이 다수 등장해 '왕따'를 재해로 규정했다. 2000년에는 반려견과 수족관의 물고기가 보험의 영역에 들어왔고, 2004년에는 주 5일제 근무를 의식한 보험이 탄생했다. 금요일 퇴근 이후부터 일요일 밤까지 날씨와 교통사고 등 휴일의 컨디션에 대해 보장한 것이다.
이런 힌트 아닌 힌트를 근거로 유리는 안나의 동선을 추적한다. 온·오프라인을 헤맨 끝에 안나가 독서모임을 했다던 속초까지 찾아간다. 그곳에서 북클럽 회원들과 모임을 하고, 그들이 함께 읽은 책인 '지속가능한 결혼 생활을 위한 지침서'의 실체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리고는 전국에 50권이 될까 말까한다는 이 책을 구한다고 중고거래 앱에 글을 올린다. 이때 나타나는 사람이 '조'라는 남자다. 과거 A.S손해보험 직원이었다는 조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심지어 유리의 마음까지.
이때부터는 순한맛이긴 하지만 추리소설 모드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조의 등장 이후 소설은 '사각관계 연애의 비밀, 추적 24시'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야 할 이유다. 296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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