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고무화 소매상 조합에서는 추석 선물로 부민에게 고무신을 배급키로 되어 임의 각 정동 급 직장에 배급한 외 제2차 증배를 9월 7일부터 실시키로 되었다. 현재 배급될 확보 수량은 삼남고무 제조화 1만 8천족, 국제고무 1만 2천 300족, 총계 3만 3천족이라고 하며 배정될 정동 구별을 보면 다음과 같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9월 8일 자)
고무신을 뺏으면 생활을 뺏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고무신은 일상의 필수품이었다. 짚신과 갖신, 미투리 등은 비가 내리거나 질퍽한 땅을 밟다 보면 이내 불편했다. 나막신을 신고 일을 할 수도 없었다. 1919년 처음으로 우리 땅에 고무신이 등장했다. 고무신은 금세 민중들의 발을 장악했다. 일제 말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물자통제가 강화됐다. 고무신 신는 것을 막았다. 대신 짚신이나 미투리를 신도록 강요했다.
고무신은 해방되자마자 부활했다. 몸에 해롭다는 고무신 유해론은 발붙일 수 없었다. 여름에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있으면 신 바닥에 물이 고이는 것이 유해론의 근거였다. 각 지역에서는 고무신 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대구의 고무신 공장으로는 삼남고무와 국제고무가 대표적이었다. 부내의 고무화소매업자들은 대구 고무화소매상 조합을 만들었다. 고무화소매상 조합은 고무신 배급을 맡았다. 쌀에 견줄 바는 아니어도 고무신의 배급은 중요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의 추석은 9월 10일이었다. 추석 이전부터 차례 음식 등의 추석 물가가 들썩였다. 고무신도 빠지지 않았다. 생활고에 직면한 시민들에게는 사기진작을 위한 선물이 필요했다. 명절선물로는 고무신이 적격이었다. 당국은 고무신 배급에 나섰다. 고무신을 동별로 할당했다. 주민이 많은 남산정이나 칠성정, 봉산정 등에는 많은 물량이 배정됐다. 추석선물로 시민들에게 배급된 고무신은 총 3만 켤레가 넘었다.
고무신의 인기가 그칠 줄 모르자 폭리를 취하는 업자도 나타났다. 당국은 때때로 고무신 폭리업자 단속을 벌였다. 농촌에서는 벗어놓은 고무신을 훔쳐 가는 고무신 도둑도 생겼다. 당시의 물가 폭등은 고무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무신이 100원 남짓할 때 양말은 7~8원 했다. 짧은 시간에 남자 고무신은 40원에서 230원, 여자 고무신은 35원에서 130원으로 오를 정도였다. 고무신의 가격 오름세가 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무신은 아이들도 갖고 싶은 선물이었다. 명절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마음은 절절했다. 아무 때나 옷이나 신발을 살 수 없는 곤궁한 시대였다. 명절이 다가오면 연례행사처럼 목욕을 했다, 그리고는 고무신을 받았다. 새 고무신이 닳을까 봐 남이 보지 않을 때는 신발을 들고 맨발로도 다녔다. 며칠 동안 머리맡에 올려놓고 쳐다만 봤다는 얘기 또한 빈말이 아니었다. 고무신의 인기는 운동화로 대체되기까지 비단 고무신, 색동 고무신 등으로 이어졌다.
살림이 어려울 때는 명절선물 하나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그 심정을 누가 알까. 피를 팔아 추석 선물을 장만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석을 앞두고 한 병원에는 평상시보다 훨씬 많은 120여 명의 사람들이 피를 뽑겠다고 몰렸다. 헌혈이 보편화되기 전이었다. 피를 팔아 고무신 같은 선물을 사고 추석을 쇠려는 사람들이었다. 60여 년 전 대구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추석선물로 배급했던 고무신은 지금의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과 다를 바 없었다. 다르다면 고무신은 한 번 받으면 최소한 반년은 거뜬히 신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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