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이동이 가능한 시절이 있었다. 소수 부자를 제외하면 보통의 삶은 궁핍했다. 너나없이 힘겨웠다. 가난한 집 자식도 머리띠 싸매고 공부하면 출세 길이 열렸다. 피땀 흘려 일해 돈을 벌기도 했다.
이 같은 '능력주의'의 순기능이 사라지고 있다. '개천에서 나는 용'은 꼰대들의 추억이 됐다. 부유하고, 많이 배운 부모는 자산을 자녀에게 물려준다. 집값이 급등하고, 일자리가 부족한 세상에서 흑수저 청년은 좌절한다. 한 줌의 부를 놓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생존경쟁이다.
능력주의는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놨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능력주의는 개인주의와 접목되고, 시장주의 안에서 극단으로 작동했다. 그 결과 '세습 자본주의'를 낳게 됐다.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자녀의 능력이 만들어진다. 이는 자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한다. 세습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불평등이 커지는 큰 요인은 정치다. 기득권 엘리트 정당으로 변해 가는 우리나라 양대 정당의 책임이 크다. 보수-진보, 좌파-우파를 막론하고 상위 계층의 이해관계에 쏠려 있다. 양대 정당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데 인색하다. 지난 수십 년간 두 세력이 한국의 정치를 지배했다. 1970년대식 산업화 세력과 1980년대식 민주화 세력이다. 이들은 핵심 권력과 자원을 분점하고 있다. 세상이 변했는데도 우리 사회를 1970·80년대에 묶어 두려는 집착을 보이고 있다.
한국 정치는 미래보다 과거에 머물러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과 '적폐 청산'을 내세운다. 과정과 결과는 정치 보복이었다. 그래서 양대 정당은 정권을 놓고 죽기 살기로 싸운다. 국민을 위해 목숨 걸겠다는 목소리는 없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양대 정당의 대선 주자들은 미래와 희망을 호명한다. 서민과 사회적 소수를 위한 정책을 제시한다. 키워드는 '불평등 해소' '불공정 완화' '일자리 창출' '부동산 대책' '복지 확대' '기본소득' 등이다. 그러나 복지 확대에는 증세가 없고, 기본소득에는 대책이 없다. 그럴싸하나, 믿기지 않는다. 도깨비 방망이라도 쥐었다면 모를까.
정책 토론에는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부동산 정책과 불평등 해소를 얘기하다가 배가 산으로 간다. 핵심을 벗어나 말꼬리 물기만 이어진다. "현 정부의 실정 때문이다, 과거 정부의 잘못이다." 모두가 네 탓이고 내 탓은 없다. 말실수라도 하면 승냥이 떼처럼 물어뜯는다. 의혹 제기, 사생활 들추기, 네거티브 공방만 오간다. 정치는 없고 정치공학만 있다. 통합은 없고 진영 논리가 판을 친다. 내 편만 있고, 국민은 없다.
한국은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위드 코로나, 4차 산업혁명, 지역균형발전, 기후 위기, 소득 양극화, 실업난, 부동산과 교육 문제, 이념 및 계층 갈등…. 사회적 문제가 난마처럼 얽혀 있다.
국민은 선거 때마다 속아왔다. 절망이 허망하듯이 희망 또한 허망함을 잘 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우리는 선거에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한다.
"모든 시대 모든 풍토에서 다양한 사회의 엘리트들은 불평등을 '자연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불평등은 경제적인 것도 기술공학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자본과 이데올로기')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냉철한 통찰이다.
※그동안 졸고를 인내심 갖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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