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빨간 염소 키우기

박주연
박주연 '여행자의 책' 공동대표

5, 6년 된 일이다. 국제구호개발 NGO인 '세이브더칠드런'이 기부문화 조성을 위해 만든 애플리케이션(앱) 중에 '빨간 염소 키우기'라는 게임이 있었다.

필자는 매일 그 앱을 켜서 스마트폰 속에서 염소를 키웠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에게는 꼭 그 앱을 소개했다. 그들은 "지난번엔 나무 심는 앱을 깔라더니 이제 염소냐"며 투정 부리면서도 금세 서로 키우는 염소의 종을 확인하며 안부를 물어왔다.

나는 매일 스마트폰 속에서 새끼 염소가 무럭무럭 자라도록 모링가와 콩, 밀을 심었고, 염소젖으로 치즈도 생산해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앱 사용 기간이 만료돼 염소를 키울 수 없게 되었다. 금단증세를 느낀 나는 '세이브더칠드런'으로 전화를 걸어 실제 후원도 하고 있으니 '빨간 염소 키우기'를 계속할 수 없겠냐고 애원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내 목소리가 성인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더욱 난감해했다.

내가 이 앱에 곧장 빠져든 것은 기부문화에 동참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어린 시절 실제로 염소를 키워보았기 때문이다. 팔공산 자락으로 처음 이사 가서 겪은 가장 큰 곤란은 집 옆 풀숲의 존재였다. 결국 이웃 할머니 말씀대로 '풀 없애는 데는 염소 뿐'이라는 노하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영천 금호장에 염소를 사러 갔으니 그날은 3일이나 8일로 끝나는 날이었을 것이다. 염소 한 마리만 사려는 엄마에게 염소장수는 "외로움을 타는 염소는 부부를 함께 키워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염소 한 쌍을 사려했더니 "아직 젖을 안 뗀 새끼들도 사가라"는 것이었다. 염소 한 식구를 데려오려 했더니 "그날 나온 염소를 다 사면 부르는 대로 깎아주겠다"는 제안이 뒤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토요일 엄마는 염소 여덟 마리와 함께 집에 도착했다.

염소들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자신들의 임무를 듣고 왔다는 듯 집 옆 풀숲으로 들어가 끼니를 해결했다. 언젠가 TV에서 봤던 시골다방 아가씨의 껌 씹는 모습처럼 염소들은 하나같이 풀을 뜯고, 씹고, 맛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얼마 전까지 풀숲이었으나 주차장이라 불러도 수긍할 만한 공간을 발견했다. 그 많던 풀잎이 여덟 마리의 뱃속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풀이 사라져버리니 염소들이 우리집에 있어야 할 이유도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가족이란 원래 이해되지 않는 캐릭터들의 집합체 아닐까. 반려동물들이 으레 그렇듯 아침, 점심, 저녁만 먹고 나니 금세 정이 들었다.

염소가 어린이들에게 어떤 웃음을 줄지 알기에 '세이브더칠드런'의 아프리카 빨간 염소 보내기 캠페인은 지금도 응원하고 있다. 몇 년 전 그날 전화를 받은 직원은 조만간 다시 앱이 구동될 수 있도록 힘써 보겠다고 나를 달랬다. 아마도 전화를 그만 끊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요즘도 앱스토어에 들어가 '빨간 염소 키우기'를 검색해본다. 그리고 그것이 없음을 못내 아쉬워한다. 그 직원이 이 지면을 읽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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