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으로 시작됐다. 남·북한은 전력에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북한군은 한국군을 일거에 제압하고 파죽지세로 남진(南進)을 개시했다.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대한민국의 구원에 나선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6·25 남침을 소련의 세계 공산화 전략의 하나로 간주하고 강력하게 대응하고 나섰다.
그는 맥아더 극동 미군 총사령관에게 휘하 미군의 즉각적 한반도 파병을 지시하는 한편 유엔 안보리를 소집해 북한의 남침을 유엔헌장상의 '침략자'로 단정하고 유엔 회원국들에게 한반도 파병을 요구했다.
국제전쟁을 띤 6·25전쟁은 밀고 밀리는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1951년 봄부터는 한반도의 허리 부분의 산악지대에 형성된 전선에서 일진일퇴의 참호전을 되풀이했다.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감수한 끝에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공산군 간에 군사정전협정이 체결, 3년간 지속된 전화(戰火)를 끄는 데 겨우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참혹했던 6·25 국난을 극복하고 오늘날 선진 대국으로의 비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이승만 건국 대통령과 미국의 트루먼 33대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특유한 선지자적 신념, 한미 우호 관계를 관리하는 발군의 외교 수완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6·25 국난을 극복하고 공산주의자들의 독 이빨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1948년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산파역(産婆役)을 감당했던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군의 전면 남침 사실을 전화로 보고받고 주말을 이용한 향리 휴가를 단축하고 서둘러 워싱턴으로 귀환했다. 이어 즉각 취하기 시작한 일련의 대응 조치가 조금만 늦어졌더라도 대한민국의 운명은 아무도 예단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 뒤 70년 가까운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한미 양국 간에는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와 국제 환경 속에서 '단순한 군사동맹'이 아니라 일변 북한의 핵 도발에 대처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국제 평화와 안보 현안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다변적 전략동맹'으로 '한미동맹'을 확대 발전시키는 변화와 적응의 과정이 꾸준하게 진행돼 왔다.
그동안 한국의 애국 시민사회에서는 '한미동맹'의 영속적 존속과 발전을 위한 상징물로 이승만·트루먼 두 대통령의 동상을 조각해 적지에 건립하자는 논의가 있어 왔다. 이런 와중(渦中)에 한 중견 기업인 독지가가 거액의 성금을 출연하여 서울 세종로의 세종대왕 동상을 조각한 한국 최고의 동상 조각가 김영원 전 홍익대 미술대학장의 손으로 각각 4.2m 높이의 두 대통령 동상을 완성시켜 놓았다. 이에 따라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이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 중이다.
최근 추진위가 경상북도와 6·25전쟁 초기 '낙동강 방위선'의 최격전지였던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두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는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 기념관에 두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면 기념관에 금상첨화의 효과를 가져다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다부동 전투'의 영웅 고(故) 백선엽 대장의 동상만 추가된다면 이 전적지의 화룡점정이 완성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불패성을 일깨워 주는 호국의 상징물이 될 것이다. 또한 칠곡을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 전적지 관광의 명소(名所)로 우뚝 서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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