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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읽는스포츠] 삼성은 왜 아직도 장효조, 이만수를 미워하나

대구가 낳은 야구 전설이지만 구단은 푸대접…장효조 10주기 추모 외면, 팬 원해도 이만수 감독은 안돼…1980, 90년대 KS 우승 못 시킨 죗값

지난달 12일 부산 사직야구장 최동원 동상 앞에서 열린 고(故) 최동원(1958-2011)을 기리는 10주기 추모 행사에서 모친 김정자 여사가 롯데 자이언츠 래리 서튼 감독과 주장 전준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2일 부산 사직야구장 최동원 동상 앞에서 열린 고(故) 최동원(1958-2011)을 기리는 10주기 추모 행사에서 모친 김정자 여사가 롯데 자이언츠 래리 서튼 감독과 주장 전준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교성 디지털논설위원
김교성 디지털논설위원

올해 고인이 된 지 10주기를 맞은 '야구 전설' 최동원과 장효조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하는 야구인들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은퇴 야구인 모임인 일구회는 지난달 1일 '우리는 최동원과 장효조를 잊지 않겠다'는 추도문을 냈다. 일구회는 추도문에서 "야구를 사랑했던 두 전설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 됐지만, 지금의 야구팬이 두 분에 관해 얼마큼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며 "지금의 활약과 숫자만 주목하다 보니 유니폼을 벗는 순간 어느 선수나 잊혀만 간다. 야구 관계자들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일신문은 지난달 2일 '최동원은 기억되지만…장효조는 잊혀져간다'는 기사를 통해 2011년 9월 7일(장효조)과 14일(최동원) 차례로 세상을 등진 두 전설에 대한 10주기 추모 열기의 차이를 전했다.

롯데 자이언츠는 지난달 12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키움 히어로즈와의 더블헤더에 앞서 '고 최동원 추모 행사'를 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 여사와 롯데 이석환 대표이사, 성민규 단장, 래리 서튼 감독, 주장 전준우가 참석했다. 이들은 사직구장 광장에 설치한 최동원 동상 앞에서 헌화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사직구장 전광판 아래에는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이 부착돼 있다. 롯데의 유일한 영구 결번이다. 추모 행사에는 팬들도 함께했다. 최동원 이름과 등번호가 적혀 있는 유니폼을 입은 팬도 있었다. 주장 전준우는 "최동원 선배님은 롯데를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을 바치신 분이다. 뜻깊은 행사에 주장으로 참석할 수 있어 기뻤다. 선수단 모두가 선배님을 한 번씩 떠올리며 좀 더 투지 있고 집중력 있게 경기를 치렀으면 한다"고 했다.

이만수 헐크 파운데이션 이사장이 라오스 야구대표팀 선수단장 자격으로 지난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참가, 라오스의 선전을 다짐하며 포즈를 취했다. 매일신문 DB
'방망이를 거꾸로 들어도 3할을 친다'는 타격의 달인 장효조가 지난달 7일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를 맞았으나 삼성 구단이 추모 행사를 마련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사진은 생전 장효조가 정장을 차려입고 포즈를 취한 모습. 매일신문 DB

그러나 고 장효조의 10주기였던 지난달 7일 삼성 라이온즈의 홈구장인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는 조용했다. 장효조의 10주기를 앞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삼성 구단은 이를 외면했다. 경기장 어디에서도 장효조와 관련된 흔적은 없었다. 몇몇 팬들이 장효조 유니폼을 챙겨오고, 또 중계방송에서 장효조를 추억하는 영상을 내보냈을 뿐이다.

장효조를 추모하고 그를 기억하는 상징물도 없다. 2016년 대구시민운동장에서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로 전용구장을 옮길 당시 장효조를 기억하고 기리는 흉상 건립 제안이 있었지만, 삼성 구단은 지금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대구삼성라이온즈파크 외야 관중석 왼편에는 10번을 새긴 번호판이 있다. 프랜차이즈 스타인 양준혁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삼성은 2010년 은퇴에 맞춰 그가 달고 뛰던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10번은 양준혁에 앞서 장효조가 달았던 등번호다. 양준혁이 훌륭한 성적을 남긴 선수이지만, '타격의 달인', '안타 제조기'로 불린 장효조가 후배에게 묻힐 선수는 아니다.

삼성에서 외면받는 대구 출신의 야구 레전드에는 이만수 헐크 파운데이션 이사장도 있다. '내 심장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는 오직 삼성에서만 현역 생활을 한 대구가 낳은 최고의 프로야구 스타 중 한 명이다.

SK 와이번스 사령탑에서 물러난 뒤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에서 야구 보급에 힘쓰고 있는 이만수는 대구 팬들의 절대적인 염원에도 삼성으로부터 감독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응용, 김인식, 김성근 등 60대 이상의 감독들이 KBO리그를 주름잡던 시절과는 달리 최근 젊은 감독들이 주를 이루는 추세를 고려하면 이제 이만수가 삼성 지휘봉을 잡는 모습은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삼성은 예전부터 여러 번 파격적인 감독 선임을 했다. 손잡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라이벌 해태 타이거즈 출신의 서정환(삼성 출신이지만 해태서 주로 선수 생활), 김응용, 선동열 감독과 프런트 전력분석원 출신인 허삼영 감독이 대표적이다. 반면 유중일 감독을 제외하고 이만수 등 삼성 출신 스타들은 철저히 외면받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삼성은 왜 아직도 두 걸출한 스타를 멀리할까. '한번 버린 사람은 다시 쓰지 않는다'는 삼성그룹 선대의 가르침 때문일까. 두 스타의 너무 뛰어난 존재감이 프런트의 입지를 약하게 했기 때문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이만수 헐크 파운데이션 이사장이 라오스 야구대표팀 선수단장 자격으로 지난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참가, 라오스의 선전을 다짐하며 포즈를 취했다. 매일신문 DB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두 선수는 훌륭했지만. 1980, 1990년대 삼성 우승의 숙원을 풀지 못한 괘씸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삼성은 이 기간 무당을 불러 굿까지 할 정도로 우승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했지만, 전국구 스타였던 이만수와 장효조를 두고도 한국시리즈 정상 등극에 실패했다. 이에 반해 최동원은 1984년 롯데 우승의 주역이다. 이때 삼성은 롯데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삼성그룹의 특명을 받고 야구단에 부임한 사장과 단장 등 삼성 프런트는 우승 실패로 번번이 물갈이됐다.

두 스타는 또 구단과 큰 마찰을 빚으며 좋지 않은 끝맺음을 했다. 장효조는 1988년 말 이른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파동'으로 롯데로 트레이드됐고 1992년 그곳에서 은퇴했다. 장효조는 앞서 연봉 협상 문제로도 구단과 갈등을 겪었다.

이만수는 40세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가려는 꿈을 가졌으나 구단의 반대로 어정쩡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는 구단의 코치직 제안을 뿌리치고 자비로 미국 유학을 떠났고 삼성이 아닌 SK 수석코치로 국내 복귀한 뒤 감독을 역임했다. 은퇴 과정에서 이만수는 구단 간부와 '진실 논란'을 빚는 등 사실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의 등번호 22번이 삼성에서 영구 결번 처리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삼성은 이만수가 1997년 은퇴한 뒤 7년이 지난 2004년에야 22번을 영구 결번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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