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덕현의 엔터인사이드] ‘홍천기’, 청춘을 위한 판타지 로맨스 사극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 판타지 로맨스 사극에 녹여낸 청춘의 현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이제 운명적인 사랑은 현대극에서는 갈수록 믿기 어려워진다. 그만큼 현실의 무게가 무거워져서일 게다. 그래서일까.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사극같은 장르 속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운명적인 사랑이 빛을 발한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가 바로 그 대표적 사례다.

◆판타지를 분명히 한 사극의 등장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는 시작부터 이 사극이 판타지라는 걸 드러낸다. 마왕이 등장하고 그와 맞서는 삼신(문숙)이 나온다. 또한 마왕은 죽일 수 없고 다만 '신령한 그림'같은 것에 봉인하는 것이 유일하게 물리칠 수 있는 길이라는 '판타지의 기본 설정'도 제시된다.

왕에게 깃든 마왕을 끄집어내기 위해 신령한 어진을 그리고 눈을 그려 넣음으로써 마왕을 봉인해내는 그 설정은, 다름 아닌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를 뒤집어 해석한 것이다. 눈을 그려넣자 용이 그림 속에서 나와 승천했다는 고사를 판타지로 재해석해 눈을 그려 넣어 완성된 신령한 그림 속으로 마왕을 봉인한다는 방식으로 활용한 것.

마왕이나 삼신이 등장하고 그것이 CG로 표현되는 장면은 '홍천기'가 역사를 담는 여타의 사극들과는 다르다는 걸 시각적으로까지 드러낸다. 그래서 첫 회에 마왕이 등장했을 때 시청자들이 느낀 어색함은 CG 자체가 완벽하지 않아서 생긴 일만은 아니다.

사극과 마왕이라는 조합 자체가 어색하게 다가온 면이 있어서다. 2014년 방영됐던 '야경꾼일지'의 CG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질적 향상이 느껴졌지만, 사극과 판타지적 존재들의 결합에는 그간 우리가 봐온 사극의 오랜 전통으로 인해 어떤 장벽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시작과 함께 CG로 처리된 마왕을 보여준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하나는 SBS '조선구마사'가 역사 고증 논란과 함께 2회 만에 폐지된 후, 사극들은 시청자들에게 그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정통 사극인지, 역사에 허구적 상상력을 더한 퓨전 사극인지, 나아가 역사와는 상관없는 판타지 사극인지를 분명히 해야 불필요한 논란을 피할 수 있어서다.

'홍천기'는 마왕을 드러냄으로써 판타지 사극이라는 걸 분명히 했고, 게다가 원작소설과는 달리 시대와 인물들을 모두 가상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드라마 시작과 함께 마왕을 보여준 첫 번째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이렇게 다소 황당할 수 있는 판타지 장면을 앞쪽에서 보여준 후, 그 뒤에 이어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차츰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넓혀가겠다는 전략적 선택이다.

마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마왕과 삼신의 대결 구도를 이 판타지의 주요 설정으로 끌어낸 후, 우리에게 익숙한 사극의 매력적인 인물들과 이야기들을 개연성있게 그려 시청자들을 몰입시켜나겠다는 전략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실제로 먹혀들었다. 홍천기(김유정)와 하람(안효섭)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통해서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서로를 보지 못해서 더 애틋해진 운명적 멜로

'화룡점정'의 고사를 판타지 설정의 밑그림으로 가져온 이 드라마는, 인물들의 엇갈린 운명과 사랑의 이야기에서도 '눈'의 모티브를 활용한다. 마왕에 의해 함께 서로를 보지 못하는 운명에 처하기 때문이다. 운명적으로 얽힌 홍천기와 하람은 오랜 가뭄에서 벗어나고자 궁중에서 기우제를 올리던 날 우연히 만나게 된다.

아버지 홍은오(최광일)가 영종어용을 그려 봉인한 마왕의 저주로 눈을 잃은 어린 홍천기(이남경)는 어린 하람(최승훈)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날 복숭아밭에서 함께 뛰어 놀다 가까워진 소년과 소녀는 뒤바뀐 운명을 맞게 된다. 기우제의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진 하람의 몸으로 영종어용의 봉인에서 풀려난 마왕이 깃들자, 삼신(문숙)이 그의 눈을 빼앗은 것.

이로써 눈이 없는(이것 역시 화룡점정의 판타지를 활용한 설정이다) 마왕은 하람의 몸에 봉인된다. 대신 삼신은 그 눈을, 나중에 신령한 화공으로 성장해 마왕을 봉인할 그림을 그릴, 눈먼 홍천기에게 맡겨 놓는다. 그래서 상황이 역전되어 성인이 된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홍천기는 하람이 복숭아밭의 그 소년이었다는 걸 알아보지 못하고, 하람은 눈이 멀어 홍천기를 보지 못한다. 이런 서로를 보지 못한다는 설정은 이들의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어려서의 사랑을 나이들어 찾아내는 이야기는 멜로에서 흔히 쓰이는 코드지만, '홍천기'에는 이것이 그림과 '보지 못하는 눈' 같은 장치들이 더해져 훨씬 절절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보지 않고도 상대방을 알아차린다는 사실 자체가 '운명적인' 이들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람의 몸에 봉인되어 있는 마왕은 보름달이 찬 날 홍천기를 만나자 순간 봉인이 풀려 버린다. 봉인의 의미로 목뒤에 새겨진 나비 그림이 사라지고, 하람은 물괴로 변신해 살인을 일삼고 홍천기에게 맡겨진 자신의 눈을 되찾으려 한다. 홍천기를 사랑하는 하람과 그 몸속에서 꿈틀대며 홍천기의 눈을 빼앗으려는 마왕이 한 몸에서 부딪치고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상황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나 '노트르담의 꼽추', '헐크' 같은 서사가 가진 이중적 캐릭터의 매력이 더해져 이 판타지 로맨스를 더 긴장감 있게 만들어준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홍천기'에 담아낸 청춘의 성장 서사

멜로만큼 '홍천기'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홍천기(김유정)라는 백유화단 소속 화공의 성장 서사다. 양명대군(공명)이 주최한 그림 경연대회인 매죽헌 화회는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의 사극판처럼 연출됐다. 전국 각지의 실력 있는 화공들이 한 자리에 모여, 3차에 걸친 미션에 따른 그림을 그려내고 이를 화단의 대표들과 양명대군이 심사해 투표를 통해 승자를 뽑는 과정이 그려졌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홍천기가 심사의 '불공정함'을 토로하는 대목이다. 그 누구보다 창의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냈지만, 양명대군은 그의 나비그림에서 모작을 그린 범인이 바로 그라는 걸 알아채고는 의도적으로 탈락시키려 하자 홍천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군요. 매죽헌에서 그림 경연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대군 나으리께서 매죽헌 화회는 신분과 계급을 떼고 오직 실력으로만 겨루는 경연이라 하셨습니다. 헌데 그것은 다 듣기 좋은 말 뿐이고, 결국 대군 나으리의 취향과 생각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물론 양명대군이 불공정한 심사를 하려 한 건 아니지만, 이 상황을 지켜보는 다른 화공들이 "결국 붙을 놈은 붙고 떨어질 놈은 떨어진다"는 한탄을 하는 대목은 현재의 청춘들이 사회의 첫발부터 겪는 불공정한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한 장면. SBS 제공

바로 이 불공정한 현실을 사극의 한 장면으로 끌어온 '홍천기'는 이것을 기막힌 판타지 설정으로 반전 서사를 그려낸다. 즉 어디선가 날아든 나비 한 쌍이 홍천기가 그린 매화 꽃 그림 위에 앉는 설정이다. 마치 담징의 소나무 벽화에 새들이 와 부딪쳤다는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 설정은 세상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늘이 알아보는' 실력이라는 판타지적 지점을 제대로 건드린다.

이처럼 '홍천기'는 청춘들의 사랑과 성장 서사를 판타지 사극의 틀로 잘 녹여낸 작품이다. 물괴와 선비 사이를 오가는 하람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와의 달콤 살벌한 멜로는 물론이고, 청춘 홍천기의 성장 서사가 균형을 이룬 작품. '해를 품은 달', '성균관 스캔들'의 원작 소설을 쓴 정은궐 작가의 이 작품은 그 계보를 잇는 또 하나의 완성도 높은 청춘 서사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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