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는 삶에 대해 사색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다가와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때로는 그 무언가가 내가 만난 멋진 사람이기도 하고, 때로는 우연히 마주친 멋진 문장이기도 하다. 내가 산 카드에는 우아하게 나이든 여인이 서있고, 곁에는 "Women don't grow old. They just become more important.(여자는 늙지 않는다. 더 중요해질 뿐이다.)"라고 적혀있다. 우아하게 나이 들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글쎄, 중요해진다는 건 뭘까?
영국에 가면 꼬박꼬박 제시(Jessie)할머니를 찾아갔다. 팔십이 다된 노인이 자신의 지난 삶을 들려주는데, 인생의 대선배가 하는 이야기라서 귀담아 듣는다. 가장 큰 보람은 장애인들과 함께한 일이라면서, 그들이 훈련을 마치고 뭔가를 할 수 있게 되면 정말 멋진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들은 열린 마음과 뛰어난 유머감각을 지닌, 우리와는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다. 버스를 타러 가는데 한 지적장애인이 가방을 들어준 날, 자신이 무척 중요하게(so important)느껴졌다고 했다.
하워드(Howard)는 장애인 서포터(supporter)다. 먹이고 입히며 돌보는 간병인(carer)과 달리, 장보기나 세탁 같은 일상생활을 스스로 하도록 지도해주는 일을 한다. 칠십이 넘은 그에게 아직도 그 일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직장동료들은 휴가를 다녀온 그에게 흔하고 뻔한 인사를 건네고는 곧바로 자리로 돌아가 일했는데, 장애인들은 다르다고 했다. 그들은 환한 미소로 반기고, 두 팔을 벌려 끌어안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직접 구운 케이크와 과자를 주었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진심이 느껴진다고 했다.
빌 브라이슨은 <발칙한 미국학>에서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영국은 정말 홍보 여행을 다니기에 더없이 좋은 나라"라며, "독자들은 대단히 지적이고 안목이 높은데다가 엄청나게 잘 생기고 책을 구매하는데 인색하지 않다."고 했다. 그걸 읽었기에 나는 친구 스텔라가 옥스퍼드에 온 그를 만났다는 말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의 박식함에 감탄하고 그의 유머에 낄낄 웃었던 게 생각나서 그가 몹시 궁금했다.
영국을 사랑하는 미국인 작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다.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줄을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린 끝에서야 드디어 스텔라의 차례가 되었다. 그를 만나자마자 스텔라는 자신을 그토록 오래 기다리게 한 이유를 단박에 알게 되었고, 시간낭비일 것 같아 포기하려던 기다림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빌 브라이슨은 일일이 의자에서 일어나 악수를 했고, 관심을 담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친구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다니까 그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묻고, 글과 함께 사인을 해줬다고 했다. 그 순간 스텔라는 자신이 'the most important person(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여태 듣고 담아놓았던 말들을 찬찬히 되짚어본다. 모두가 '내가 중요해지는 순간'을 말한다. 나에게 따듯한 배려와 친절을 베푼 사람을 떠올린다. 미소와 포옹으로 반가움을 표현하고, 정성이 깃든 선물을 건네준 사람을 기억한다.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나를 정중하게 대해준 사람을 잊지 않는다.
이숙영은 <92세 아버지의 행복 심리학>에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한 말을 옮겨놓았다. "이왕이면 품격 있는 삶을 살라.", "고맙다고 말하고, 누군가를 위해 돈과 마음을 들여 선물하고, 주변에 작은 배려와 친절을 베풀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을 쓰면, 우리 삶에는 품격과 향기가 따라온다."는 말을 전했다. 92세 노인이 말하는 '품격 있는 삶을 위한 실행방식'이 '나를 중요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것들'과 닮아 신기하다.
바라보는 시선이 내가 아니라 상대를 향해있는 게 똑같다. 나보다는 상대를 더 중요한 존재로 대하는 게 다르지 않다. 마음과 태도 모두 상대를 존중하고 있다. 존중해야 존중받을 수 있고, 존중받아야 중요해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고, 그건 내가 늙어서도 되고 싶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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