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가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로 독자를 만난다. 한강 작가가 '흰' 이후 5년 만에 낸 장편소설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독자와 만남이 낯설지 않다. 2019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전반부를 연재한 바 있어서다.
애초 이 소설은 2015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2018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작별'을 잇는 '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한 것이었다. 예상과 달리 분량이 길어지면서 장편으로 써낸 작품이라고 한다.
제주가 배경이다. 눈 오는 제주를 소설 속에 가득 채운다. 낭만적으로 쉬어가는 공간으로 다가오는 제주가 아니다. 눈은 제주의 기억, 4.3 사건을 불러오는 기재다. 구원(舊怨)을 덮고 있던 눈(雪)을 작가는 걷어내기 시작한다.
소설은 눈의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다. 하염없이 내리고 쌓이는 눈이다. 청회색의 낮은 명도와 눈에 둘러싸인 여명의 시간은 은폐되기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덮여있던 4.3 사건들은 소설 속 내 친구, 이웃의 이야기로 재생된다.
책 표지도 의도가 읽힌다. 썰물 때면 모든 흔적들, 학살의 흔적도 깨끗이 쓸어갈 모래사장이 실렸다. 코앞으로는 거대한 눈보라가 다가오는 듯하다. 다시 보면 가까이에 있는, 거대한 하얀 천이다. 시신을 덮는 수시포(收屍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눈으로 시작한다. 떨어지는 눈송이 낱개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성근 눈이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서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 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작가가 실제로 꾼 꿈은 기록으로 남았고 작품의 첫 문단이 됐다. 한강 작가는 이 꿈을 2014년 먼저 썼다고 했다. 작가가 광주 5·18을 다룬 '소년이 온다'(2014년 5월 출간)를 발표한 이후 꿨던 꿈이라 했다.
작품 속 화자는 공교롭게도 소설가인 '경하'다. 경하는 5월에 작품을 발표한 뒤 그해 여름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를 만큼 삶의 의지를 잃은 터였다. 유서까지 써놓고 죽으려 마음먹었던 그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급한 연락이 온다. 제주에 있는 친구, 다큐멘터리 감독 인선이다. 서울의 한 병원이라고 했다. 통나무 다듬기 작업을 하다 검지와 중지가 한마디씩 절단된 사고 때문이었다. 병원에 누워있던 인선은 신경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 봉합 부위에 주삿바늘을 찔러 피를 내는 치료를 3분에 한 번씩 24시간 내내 3주 동안 받아야 했다.
이는 작품의 주제와도 강하게 연결되는 대목이다. 인선은 이렇게 말한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그러면서 인선은 경하에게 제주로 당장 내려가줄 것을 간청한다. 홀로 남겨진 앵무새 '아마' 때문이었다. 오늘 내려가지 않으면 앵무새가 죽을 것이라 했다. 생에 미련이 없던 경하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작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경하와 인선, 인선의 어머니, 죽은 사람들로 이어진 실이 하나로 연결되고 그 실에 전류가 통하고 생명이 돌게 되는 것을 상상했다"면서 "손가락을 봉합할 땐 붙인 자리에 계속 상처를 만들어 피가 흐르게 하고 계속 전류가 흐르게 하며, 생명이 흐르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려나간 부분이 썩어버린다. 고통스럽지만 환부에 바늘을 찔러넣어 살아있게 만드는 과정이 소설 전체와 이어진다"고 했다.

책은 3부로 구성된다. 사실상 2부에 가깝다. 제주에 있는 인선의 집으로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한 경하는 2부에서부터 환상에 가까운 기사(奇事)를 경험한다. 그것을 통해 경하는 인선이 모아둔 제주 4·3사건의 기록들을 만난다. 경하는 특히 1948년 13살이던 인선의 어머니 정심이 오빠 정훈의 생사를 오랜 기간 쫓아왔다는 걸 알게 된다.
한국 현대사의 가슴 찢기는 아픔인 제주 4·3은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기어이 묻고, 기어코 멸절의 길로 내몰던 광기의 시대는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에서도, 대구 달성 가창골에서도 있었다. 한강의 작품을 오롯이 소설로만 소화하기 힘든 까닭이다.
그럼에도 문학적 비유와 표현력이 '넘사벽'이다. 곱씹어 읽게 만드는 시적인 문장, 그에 따르는 이미지의 연상과 합성이 진도를 늦춘다. 작가는 1993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력이 있다.
그는 출간 기념 기자회견에서 "누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느냐고 물으면 어떤 때는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답했고, 또 어떤 때는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소설, 제주 4·3에 대한 소설이라고도 답했다"며 "그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란 말을 고르고 싶다"고 했다. 332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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