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은 조선 전국 8도(道)에서 가장 많은 고을과 가장 넓은 땅인 경상도에 속했다. 경상도가 남북으로 나뉘고 13개 도(道)로 바뀐 뒤에도 경북은 면적과 인구가 최다였다. 또 경북의 고을과 관련된 성씨(姓氏)의 관향(貫鄕)이 많아선지 종가(宗家)도 숱했다.
2017년 조사된 경북도 자료에는 조선 후기까지 대대손손 제사를 지내는 국불천위(國不遷位)도 100위(位)이고, 다른 불천위까지 더하면 200위(位)가 넘을 만큼 종가 문화가 짙은 경북이었다. 종택(宗宅)도 전국 최다인 200곳 넘었다. 항일도 심한 탓에 1934년 조선총독부 비밀자료집(『고등경찰요사』)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본도(경상북도)는 양반 유생의 연총(淵叢·모이는 곳)으로…대소 양반 유생이 각지에 산재하여 그 수가 3만3천900여 호(戶)이며, 인구는 16만4천여명의 다수가 된다.…배일(排日) 사례는…하나하나 들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지금까지 사회의 이목을 놀라게 한 중요 범죄 사건에는 본도의 관계자가 없는 일이 거의 없다.…"

◆ "나라 되찾자" 종손들 앞장
문중(門中)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듯 종손들도 종가 일처럼 독립운동에 나섰다. 경북에서는 복국(復國)의 꿈을 안고 가산을 정리, 가족과 함께 집단 망명을 떠나 중국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등 항일 투쟁의 희생을 감수한 종손 활동이 이어졌다.
안동 임하 천전리(내앞마을) 의성 김씨 집성촌에는 학봉 김성일 5형제를 낳은 청계 김진(金璡) 집안의 '큰종가'와 '작은종가'가 있는데, 큰종가 종손 김병식(金秉植·애족장)과 작은종가 종손 김대락(金大洛·애족장)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김병식은 안동의 협동학교 교장을 지냈고,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서명했다. 김대락도 협동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가족 등 150여명을 이끌고 망명, 중국에서 항일 활동을 벌였다.

안동 서후면 금계리(金溪里)에는 조손(祖孫) 독립운동가의 종손의 사연이 전한다. 즉 청계 김진의 4남인 학봉 김성일 집안 종손인 김흥락(金興洛·애족장)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 의병에 참여해 활동했고, 그의 손자는 독립군자금을 보내기 위해 파락호(破落戶)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던 종손 김용환(金龍煥·애족장)이 주인공이다.
안동의 전주 유씨 집안 정재 유치명의 종가 아들 유지호(柳止鎬·미서훈)는 안동의 의병으로 동생 유정호(柳廷鎬·미서훈)와 참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의 장남 유연박(柳淵博·건국포장)은 의병 참모와 파리장서운동서명 활동을 했고, 두 아들 유동시(柳東蓍·미서훈)와 유동저(柳東著·미서훈)는 각각 1919년 만세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또 유연박의 동생 유연성(柳淵成·애국장)은 3·1만세운동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7일만에 대구감옥에서 삶을 마쳤다.


전남 장성의 행주기씨(幸州奇氏) 집안에는 을미사변 의병장으로 전투를 벌이다 적의 흉탄에 순국한 기삼연(奇參衍·독립장)과 종손 기산도(奇山度·독립장)의 활동이 있다. 의병장 고광순(高光洵·독립장)의 사위인 기산도는 1906년 을사오적인 이근택(李根澤)을 암살하려다 옥고를 치렀고, 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 송금 문제로 잡혀 고문의 후유증으로 절음발이로 출옥했으나 순국하고 말았다.

이처럼 전국에서 뭇 종손들은 집안 계승 외에 독립 투쟁에도 합류했으니 그 부담과 희생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일그러진 보수의 모습과는 다른 종손 활동은 독립투쟁을 통한 혁신의 삶으로 평가할 만하다.

◆부자·형제 독립투사들
독립운동사에는 혈연(血緣)의 부자(父子)와 형제(兄弟)간 의리(義理)를 항일로 승화시킨 인물이 즐비하다. 숙명(宿命)처럼 얽힌 혈연을 바탕으로 독립투사의 길을 간 그들의 삶이 돋보인다. 국가보훈처 공훈록과 각종 기록이 이를 증언하고 기릴 만하다.
경북 영천 중심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의 1기 의병장인 아들 정용기(鄭鏞基·독립장)의 뒤를 이은 2기 의병장 정환직(鄭煥直·대통령장) 부자는 졸지에 같은 해 순국의 운명을 맞았다. 영천의 사찰 거동사가 해마다 이들과 삼남의진 의병을 기리는 까닭이다
성주의 김창숙(金昌淑·대한민국장)과 아들 김환기(金煥基·애족장) 사연은 애통하다. 김창숙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 참여, 독립군자금 마련 일 등으로 잡혀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벽옹'(躄翁)으로 불렸다. 김환기는 아버지 밀명으로 군자금 마련에 나섰다 붙잡혀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19세로 순국했으니 말이다.
다.


대구 출신으로 1919년 3·8 대구 만세운동 때 아들 김용해(金湧海·애국장)와 만세를 외쳤던 아버지 김태련(金兌鍊·애족장)은 수감 중에 아들을 잃었다. 아버지는 감옥 노임을 모아 23세로 순국한 아들 무덤 앞에 비를 세워 명복을 빌며 슬픔을 달랬으니 그 사무친 사연이 어떠 했겠는가.
대구 사람으로 중국에서 『동방전우』 발간 등의 활동을 벌인 이두산(李斗山·미서훈)은 두 아들 이정호(李貞浩·애국장), 이동호(李東浩·미서훈)와 망명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1945년 광복으로 이정호는 남(南), 이동호는 북(北)으로 영영 헤어지고 말았다.

경북의 의병 활동과 대구의 국채보상운동, 풍기 광복단 가입 등으로 저항한 양제안(梁濟安·애국장)을 이어 아들 양한위(梁漢緯·애국장)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양한위는 대구에서 폭탄을 만들다 들켰고, 일제 관서 폭파미수 등의 활동을 폈다. 성주의 이승희(李承熙·대통령장)와 아들 이기인(李基仁·애족장)의 부자 사연도 있다.
형제의 독립 활동도 많다. 대구 출신의 중국 망명가 이상정(李相定·독립장) 장군과 민족시인 이상화(李相和·애족장), 임시정부 활동 경력의 현정건(玄鼎健·독립장)과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에 관련한 소설가 현진건(玄鎭健·대통령표창), 서상일(徐相日·애족장)과 일본 왕족 결혼식 폭탄투척 미수사건 주인공 서상한(徐相漢·독립장) 형제도 있다.

경북 선산 출신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대한민국장)와 두 형인 허훈(許薰·애국장), 허겸(許兼·애국장) 등 형제 항일 사례는 숱하다. 서울 출신의 이건영(李健榮·애족장)과 이석영(李石榮애국장), 이철영(李哲榮·애국장), 이회영(李會榮·독립장), 이시영(李始榮·대한민국장), 이호영(李頀榮·애족장)의 6형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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