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며칠 전, 대구경북학회가 진행하는 지역학 관련 영상교육 자료를 촬영하기 위해 대구 중구 향촌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맡은 부분은 한국전쟁 시기 서울 등지에서 피란 온 문화예술인들이 대구에서 형성했던 '피란문단'이었다. 잘 알려진 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에 의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사람이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란을 왔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경상남·북도를 제외하고는 전 국토가 다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시는 대구시와 부산시가 각각 경상남·북도에서 행정구역상 분리되기 전이었다. 많은 피란민이 대구와 부산으로 피란을 했고, 문화예술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대구에서 형성된 독특한 문화예술가들의 모둠살이가 피란문단이었다.
지난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대구를 비롯한 지자체와 지역의 일부 언론이 나서서 피란문단을 조명하는 행사도 개최하고 신문 지면에 피란문단의 의미에 대해 연재하기도 했다. 물론 그 훨씬 이전에도 교육방송(EBS)을 비롯한 여러 매체가 대구 지역의 피란문단에 대해 조명하면서 피란 시대 예술가들의 좌절과 고뇌에 대해 그리기도 했다.
초가을의 따듯한 양광(陽光) 때문인지는 몰라도 향촌동 골목골목은 평상시보다 더 퇴락하고 누추해 보였다. 이미 문을 닫은 식당이나 점포도 있고 나이 든 노인들과 성인용 디스코텍이나 카바레가 대낮인데도 호객용 네온사인을 번쩍이고 있었다. 1930년대 일제 식민지 시대 최고의 번화가였고 1950, 60년대에도 대구에서 부촌으로 이름이 높았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주점을 비롯해 그나마 약간의 상권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 퇴락한 것 같았다. 그나마 의미 있고 반가웠던 것은 피란 시절 당시 예술가들이 모여 전쟁의 고통을 견뎌낸 백록다방, 꽃자리다방, 화월여관, 르네상스음악실 등 당시의 옛 건물은 사라지고 없는 자리에 '예가(藝家)터'라고 대구 중구에서 주물로 만든 표지판을 붙여놓아 희미한 흔적을 상상이라도 하게 해준 것이었다.
전쟁은 인간의 삶과 죽음, 실존에 대해 깊은 고뇌와 허무, 생존에 대한 악착과 비루함, 그리고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와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준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인리히 뵐의 '휴가병 열차',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게오르규의 '25시'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전쟁문학의 걸작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 중후한 서사의 굽이굽이 속에 깃들어 있는 나약한 인간의 좌절과 허무, 죽음과 불행, 뜻밖의 로맨스 등은 그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얼마나 큰 휴머니즘을 선사했던가. 비록 관념적인 수준에 그친다고 해도 전쟁의 참상을 통해 휴머니즘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되새기는 일은 무엇보다 값진 일이다. 국내 작품으로는 1950년대 당시에 발표된 대구 출신의 신동집 시집 '서정의 유형', 구상 시집 '초토의 시'와 그 이후 김동리 소설 '밀다원 시대', 권정생의 '몽실언니',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등도 전쟁문학으로 백미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지구 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다.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이 UN에 참석해 한국전쟁의 종전선언을 호소했다. 우리는 평소 잊고 지내지만 70년 전의 한국전쟁이 휴전 상태이지, 끝난 게 아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의 언어를 사용해 문학과 예술혼을 꽃피웠던 피란시대의 향촌동을 당시의 모습으로 온전히 복원해서 세계적인 반전과 평화의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2차 세계대전 후 냉전시대의 첫 번째 전쟁인 6·25전쟁의 세계사적 의미까지 염두에 둔다면 대구 향촌동 콘텐츠화는 분명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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