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이춘희 씨 시어머니 故 김경순 씨

1986년 김천 직지사에서 시어머니 김경순(왼쪽) 씨와 이춘희씨가 찍은 기념사진. 가족제공.
1986년 김천 직지사에서 시어머니 김경순(왼쪽) 씨와 이춘희씨가 찍은 기념사진. 가족제공.

유방암 수술을 하고 두 달이 지났다. 림프샘으로 자리를 옮긴 암의 씨를 도려내고자 어머님은 2차 수술을 받으셨다. 이승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도 짐작했으리라. 흩어져 있는 피붙이들에게 일일이 대면하고 정담을 나눌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빠르게 혹은 느리게, 때로는 기쁘게 혹은 심각하게 지나온 여정을 아들에게 펼쳐 놓으셨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어머님의 표정은 경이로웠다. 어쩌면 저렇게 평온하고 담담하실까. 저승의 세계로 홀로 떠나야 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은 이미 육신에 흡수된 듯했다. 두고 떠나야 하는 이생의 인연들이 심장에 응어리로 남아있어 그것을 풀고 있는 듯했다. 체력이 허락하지 않아 여러 날에 걸쳐 어머님이 말로 쓴 글은 아들의 머릿속에 두루마리로 간직되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참 좋은 내 인생'이란 책을 만들어 친지들이 한 권씩 가지게 되었다.

여자들은 시집이 싫어서 '시' 자가 든 시금치도 멀리한다는데, 나는 어머님의 향기에 취해서 꽃을 맴도는 나비처럼 주위를 서성였다. 긍정적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주변인들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어머님은 종갓집 맏며느리셨다. 이십 육 년 동안 홀시아버지를 정성으로 모셨다. 동네에 '말끔하게 옷을 입고 다니시는 어르신'이라고 소문이 나 있을 정도였다. 십 년 동안 중풍으로 누운 시할아버지를 불평 한마디 없이 수발하셨다. 종가의 종부로서 친인척들의 감정 다툼이 일어도 늘 해결사가 되셨다.

결혼하니 일 년에 제사가 열한 번이었다. 형님이 직장을 다니고 있어 아이들 돌보고 살림하랴 쉴 틈이 없으셨다. 손주들을 얼마나 정성껏 키우는지 어머님을 보고 나의 육아 태도를 반성하곤 했다. 장성한 자녀들을 바라보는 눈길도 항상 자녀들 눈높이에 맞추었다.

내가 시어머니가 되면 어머님만큼 넓은 마음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명절이나 제사 때 부득이 갈 수 없거나 못 갈 때면 당신이 잠을 줄여가며 일을 하더라도 며느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깨도 "그릇 바꿀 때가 되었다." 늦잠을 자서 밥상이 다 차려지고 일어나도 "많이 피곤했나 보다." 하며 늘 긍정적이셨다.

결혼 후 오 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불안해할 때 "너희 둘만 사이좋게 살면 된다."라고 토닥여 주셨다. 그런데 아기를 가지자 눈물을 흘리며 좋아하셨다. 큰아이가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낮에는 형님네 아이들을 돌보고 저녁이면 병원에 와서 자정이 되도록 간호를 도와주던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바쁜 가운데에도 부업으로 생계를 도왔다. 아버님이 공직에 계셔서 오 남매의 학비를 대고 시누이와 시동생 혼사를 치르기에는 살림이 빠듯했다. 더구나 아버님은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데 봉급을 아끼지 않으셔서 늘 적자 살림이었다.

자수를 잘해서 수를 놓아 병풍을 만들어 팔아 생활에 보태셨다. 처음에는 수만 놓다가 나중에는 직접 병풍 제작을 했다. 어렵게 돈을 벌었지만 인색하지는 않으셨다. 필요한 곳이 있으면 이웃도 성심성의껏 도우셨다. 돈이 없어 대학 등록 못 하는 친척들의 등록금을 수시로 내주셨다. 형님이 근무하는 학교의 불우한 학생에게 몇 년 동안이나 매달 용돈을 주기도 하셨다.

세상살이가 힘들어 마음이 울적한 날이면 어머님이 남기고 가신 책을 읽는다. 그러면 배려와 사랑으로 마음을 넓히라는 어머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어린 시절 슈바이처, 나이팅게일, 간디의 전기를 읽으면서 나의 별로 생각했다. 이순을 넘긴 지금은 시어머님의 별 하나가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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