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서 관련 서적을 선물받는 일이 꽤 많아졌다. 개, 고양이라는 단어만 들어갔다 싶으면 "이 책 읽어봤냐"는 질문이 쏟아진다. 바야흐로 반려동물 시대다. 반려동물에 대한 책은 나날이 늘어가고 자신의 반려동물을 자랑하려는 소재들은 넘쳐난다. 그들의 행동이나 습성을 분석한 지침서는 가판대를 거의 점령하다시피 했다.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던 찰나 '귀농'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동물' 카테고리에 있는 책인데, 무언가 신선하다. 몇 장 더 펼쳐보니 '경북 예천'이라는 단어가 눈에 또 한 번 들어온다. 반려동물과 귀농했다는 저자 한태훈 씨를 만나러 간다. 물론 '귀농견' 위키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택배 기사에서 농부로 이직 "반려견 덕분에 용기"
"책을 끝까지 안 읽어 보셨나 보네요" 태훈 씨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태훈 씨와 함께 귀농을 했다는 위키는 온데간데 없다. 대신 옆에는 비슷하게 생긴 강아지 한 마리가 자리 잡고 있다. 완독하지 않고 무작정 예천으로 달려온 성급함이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위키는 2019년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태훈 씨가 2017년에 귀농을 했으니 2년여간 농촌 생활을 함께 하다 헤어진 것이다. "위키는 귀농하기 전부터 많이 아팠어요. 사실 귀농도 위키의 건강 상태 때문에 결정한 거였어요. 조금만 더 살다 가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2016년 태훈 씨는 택배 기사였다. 당시엔 먹고사는 문제가 막바지에 다다른 상황이었고,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종일 물건을 배송했다. 그때 위키를 만났다. 녹초가 되어 집에 누워 있는데 옆집에서 강아지가 시끄럽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려니 하고 참았지만 며칠간 울음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참다참다 결국 항의하러 갔는데, 덩치 큰 개가 덩치 큰 남자에게 얻어 맞고 있었다. 깜짝 놀라 큰 개를 거의 훔치다 시피 데려 왔다. 도둑질은 할 수 없으니 정신을 차리고 옆집에 다시 갔더니 덩치 큰 남자 옆에 여자가 외쳤단다. 제발 개를 좀 데려가 달라고. 그날부터 위키는 태훈 씨와 함께 살게 됐다.
무작정 데려왔지만 보살필 시간이 부족했다. 아침저녁으로 택배 일을 하다 보니 위키는 늘 혼자였다. 엎친대 겹친 격 위키는 건강 상태도 안 좋았다. 장염의 한 종류인 파보바이러스와 심장사상충에 감염돼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까지 들었다. 위키에게 들어가는 돈도 문제였다. 며칠을 모은 택배 수수료는 병원비로 하루만에 다 들어갔다. 태훈 씨는 돈을 더 벌어야 했고 배송구역을 추가 했다. 심지어 위키는 중증근무력증이라는 병도 진단받았다. 중증근무력증이란 근육의 저하를 유발시키는 신경 근육 질환으로 사지 마비를 유발한다. "다행히 위키는 건강을 되찾았지만 저는 여전히 시간이 없었어요. 택배는 너무 바빴고, 그렇다고 위키가 갑갑해하지 않을 넓은 집으로 이사가는 것은 서울에서 거의 불가능이라고 봐야 했죠" 그때 귀농을 결심했다. 지인이 가볍게 제안한 귀농이라는 단어를 흘려 듣지 않았다. "시골? 그래 가자! 어짜피 이 도시에는 우리 둘을 위한 곳은 없어. 그래 해보자"

◆ 귀농인·귀농견의 좌충우돌 시골 적응기
태훈 씨는 우선 현실에서 고려해야 할 조건들을 가장 먼저 세웠다. "정착지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야 했어요. 위키는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검진을 해야했고, 또 갑자기 쓰러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경제적 상황과도 맞아야 했다. 택배일로 모아둔 돈은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빚을 내면서 까지 귀농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행선지는 경북 예천군으로 정해 졌다. 예천은 서울에서 2시간 15분 거리다. 백두대간인 소백산맥 구간으로 위키와 뛰어다닐 산과 들, 물이 있었다. 또한 땅값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태훈 씨는 은풍면 오류리의 야트막한 경사가 있는 밭에 작약 6,000주를 심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초보 농업인에게는 어려움이 많았다. 실제로 노력에 비해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아 몇몇 농사는 쫄딱 말아먹기도 했다. 이때 위키가 큰 도움이 됐다고. 농사를 처음 지으면 물어볼 것이 참 많다. 경작법부터 농기구 사용법, 사소한 농사 팁까지. 선배 농업인들에게 찾아가거나, 센터를 찾아가거나. 이 때마다 위키는 태훈 씨와 함께 했다. 커다란 개가 옆에서 멀뚱멀뚱 쳐다보니, 서울에서 온 청년에 대한 경계심을 쉽게 허물었으리라. 위키와 태훈 씨는 그렇게 시골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아쉽게도 위키는 농사일에 큰 재능이 없었다. 농사를 짓는 태훈 씨 옆에서 방방 뛰기만 했다. 농사 지을 흙을 온 몸에 덮어쓰는 위키 덕에 밭일은 몇 번이나 중단 됐다고. 위키는 결국 밭과 떨어진 곳으로 쫓겨 났다. 작약 꽃이 피어날 무렵에야 접근금지가 해제 됐다.

그렇다고 태훈 씨만 독박 농사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위키도 귀농견으로서 역할을 다 했다. "위키 덕분에 수입이 확 늘었어요" 태훈 씨는 귀농 후 얼마 안 돼 한 커뮤니티에 위키와 본인의 귀농 이야기를 올렸다. 이 글은 커뮤니티 인기글에 올라가게 됐다. 그러다가 또 다른 유명 커뮤니티에서도 퍼 나르기 시작하더니 방송사, 신문사에서 연락도 왔다. 유튜브도 시작했는데 구독자도 빠르게 늘었다. 그야말로 위키는 '인싸 강아지'가 됐다. 간식이나 후원금을 보내준다는 이메일이 쇄도했다. 하지만 태훈씨는 거절했다. 위키와 단 둘이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 튤립이나 작약이 피어나면 구독자나 위키의 팬 분들이 많이 구입을 해 주셨다. "위키는 우리 농가의 영업사원이었어요 (웃음) 그 감사한 마음을 저도 잊지 않기 위해 수익금은 꾸준히 유기견 센터에 기부했어요"
◆ 무턱대고 귀농? 귀농견도 펫티켓은 지켜야 해요
태훈 씨는 예비 귀농인의 연락을 많이 받는다. 개를 데리고 시골을 가면 정말 좋냐는 일차원적인 질문부터, 개가 농사에 도움은 되던가라는 엉뚱한 질문도 간혹 있다. "강아지를 데리고 귀농을 하고 싶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리 간단히 결정해야 할 사안은 아닌 듯 합니다" 시골은 작은사회이기 때문에 누군가 개를 데리고 이사를 오면 눈에 띄게 된다. 더욱이 요즘 시골에는 개가 별로 없다. 고령화로 인해 개밥주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많이 안 기르는 추세란다. 그러니 눈에 더 뛸 것이고, 펫티켓을 지키지 않으면 귀농인, 귀농견 모두 도시로 다시 쫓겨날 수도 있다. 시골이라고해서 아무데나 똥싸도 되고, 크게 짖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펫티켓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펫티켓을 지킨다면 시골은 강아지들에게 천국과도 같다. 농촌은 반려동물과 함께 뛰고 헤엄칠 수 있는 장소가 수도 없이 많다. 집 앞의 냇가, 작약밭 앞의 소나무 숲. 모든 것이 반려동물의 산책로다.

2019년 위키는 떠났고, 이제 태훈 씨 옆은 새로운 귀농견 '엘사'가 지키고 있다. 엘사도 도시에 사는 부모님 댁에서 데려왔으니 귀농견은 맞다. "귀농이란게, 살던 환경이 아예 바뀌는 거잖아요. 그 생소함을 위키 덕에 잘 견뎌냈어요. 위키가 없었다면 아마 다시 도시로 올라 갔을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지금은 엘사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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