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 향하는 순도높은 관심을 소설집 '환한 숨'으로 올봄 묶어냈던 조해진 작가가 경장편 소설 '완벽한 생애'를 냈다. 2019년 계간문예지 '자음과 모음' 여름호에 같은 제목의 단편소설로 발표됐던 작품이다.
'완벽한 생애'는 윤주, 미정, 그리고 홍콩에서 온 시징이 2020년 1월과 2월, 2021년 4월과 5월의 시간을 지나오며 깨치고, 후회하고, 마음을 다잡는 줄거리로 진행된다. 150쪽이 채 안 된다. 단박에 읽어나갈 것 같은 두께다.
그러나 "신념을 따르고 사랑에 진심일수록 상처받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며 "신념과 사랑이라는 단어들에 함유된 아름다움이 어째서 우리의 마음을 때때로 더 가난하게 하는지, 나는 늘 그것이 궁금했다"는 작가의 의도가 작품에 충실히 용해되면서, 거듭 사색하게 만드는 문장들 앞에 선 독자는 읽는 내내 서성인다. '완벽한 생애'란 속독으로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결코 아닌 것이다.

작품 속 윤주, 미정, 시징의 최선은 최선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방송국 작가 생활을 하던 윤주는 자신을 끌어준 피디가 정권이 바뀌면서 퇴출됐음에도 그대로 남아 일한다. 일부 동료는 그를 내보내고 싶어한다. 윤주가 가까이 있다는 걸 모른 채 윤주의 이야기를 이어가다 파안대소하는 동료들에게 모욕감을 느낀 뒤, 윤주는 무단결근으로 사의를 대체한다. 그리고는 제주에서 '활동가'로 불리는 친구 미정에게 간다.
미정도 심리적 여유가 바특하긴 마찬가지. 무너진 신념 탓이었다. 제주에 오기 전 서울의 한 인권법재단에서 일했던 그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폭력에 시달렸다며 군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던 성소수자 K의 주장과 K가 파트너라 주장했던 병사가 K에게 강제추행을 당했다는 주장 사이에서 누구도 믿지 못해 방황하던 터였다. 고민을 거듭하고 애쓰며 투신할수록 엉망이 되는 생애를 궁금해하다 10년 전 알게 된 보경 언니의 부름을 받고 제주에 정착한 것이었다.
다소 결이 달라 보이는 인물은 시징이다. 홍콩에서 온 시징은 동성연애자로 그의 연인이던 은철의 흔적을 찾으러 무작정 서울 영등포로 온다. 영등포는 은철의 고향이었다. 숙소 공유 사이트에 윤주가 자신의 원룸을 내놓으면서 시징은 윤주와 교감의 메모, 이메일, 메시지 등을 주고 받게 된다. 윤주와 시징은 모르는 사람에게 속내를 더 잘 털어놓는 심리적 안정감에 빠지게 되고,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옛 연인 이야기를 서로 풀어놓는다.

작가는 완벽한 생애라는 건 없다고 시종일관 이야기한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생애는 완벽할 수도 없고 완벽할 필요도 없다"고 썼다. 작품 속에서 그는 '고사리장마', '신구간'(新舊間) 등 제주 토박이만 알고 있을 법한 용어로 호기심을 들추고서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알맞게 상징어로 적용한다. 봄철 고사리가 나올 즈음인 4월에서 5월 사이 이어지는 고사리장마, 유독 춥고 궂은 날이 많은 신구간은 결국 환골탈태에 가깝게 다시 깨우친 사람의 대오각성 과정과 비슷하다. 이것에서 저것으로 넘어가려면 사이가 필요한 법이다.
윤주가 과거 자신을 모욕했던 직장 동료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마음을 다잡는 일, 옛 애인을 올곧게 정리하는 일, 미정이 아버지의 참모습을 알고 난 뒤 자신을 옥죄던 신념을 조금씩 덜어내는 일은 전환과 환기의 자세다. 지나고 나면 다 그냥이 된다.
특히 미정과 아버지의 대화는 진작 필요했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유를 물으니 아버지는 새삼스럽다는 듯 한번 흘끗 보고 대꾸한다. 막상 아버지와 대화로 알게 된 건 미정의 짐작과 거리가 있었다.
"선택이고 뭐고, 그냥 가라니까 다 갔어. 목돈 벌 생각에 지원한 군인도 있었지만 우리 부대는 전부 차출이었어. 조금이라도 돈 있고 백 있는 놈들이야 다 면제받거나 후방으로 배치되던 시절이니, 차출된 놈들은 다들 모자란 것들뿐이었지. 나는 사람은 안 죽였다. 내가 죽을 뻔한 순간에 베트콩 다리를 쏜 적은 있지만 죽이지는 않았어. 난, 그래서 여직 산 거다, 아무도 죽이지 않아서. 죽이는 걸 해본 놈들은 벌써 다 죽었어, 병들어서. 마음이 상했으니 몸도 병든 거지."

소설책 말미에 실린 최진영 소설가의 20쪽 분량 발문도 소설 본문만큼 중량감이 있다. 그는 발문에서 "사람들은 어차피 각자의 속도로 살아간다. 벗어날 수 없는 어느 시절이 무거워서, 하지만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그때에 더 머물러야 한다"라고 했다. 176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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