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원선의 힐링&여행] 경주 남산 칠불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에 밝은 아침 햇살이 비추고 있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에 밝은 아침 햇살이 비추고 있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 제312호)에 오르려면 약 2.5Km정도의 산길을 올라야 한다. 인시(寅時)를 막 지난 야행 길을 반기듯 가을 전령사 귀뚜라미가 운다. 한 발 두 발 내딛는 뒤로 또 다른 한 발 두 발이 따라오는 느낌이다. 머릿속에 든 생쥐가 처녀귀신이 따른다며 얼른 뒤 돌아보라며 귓전에 속삭인다. 밤 도깨비가 따라 붙는다고 고자질이다. 먼데서 개가 짖고 수탉이 홰를 치며 운다. 꼬임에 넘어 간 듯 뒤통수가 섬뜩하여 돌아보려든 눈길이 하늘로 향한다. 하현달이 하얗게 솔가지와 숨바꼭질로 따라붙으며 "걱정하지 마세요! 지켜줄 거예요!"하고 용기를 북돋운다. 그러기를 몇 차례 어느새 산길이 가팔라지는가 싶더니 돌계단을 지나 칠불암 앞마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아침 햇살 속의 칠불암 마애불상군
아침 햇살 속의 칠불암 마애불상군

◆일곱개의 불상을 모신 칠불암 마애불상군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삼층석탑이다. 사람의 키 만큼 낮아 보이는 석탑, 기단석에 몸을 올려 면석에 어깨를 기댄 기왓장엔 "환영 칠불암"이라 적혀있다. 뒤편으로 웅장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의연한 자세로 어둠에 묻혀있다. 암자는 밤을 빌어 비운 듯 인기척이 없다보니 말 그대로 적막강산에 무주공산이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부처님을 포함한 7구의 불상을 모셨다. 가파른 산비탈의 동쪽과 북쪽에 4m높이의 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사각형으로 돌을 깎아 각 면에 불상을 새겨 사방불을 모셨다. 뒤쪽 병풍석에는 중앙으로 여래좌상을 두고 좌우로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총 7구의 불상을 모신 까닭에 칠불암이라 부른다. 보살상이 본존불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현달 아래 칠불암과 칠불암 마애불상군
하현달 아래 칠불암과 칠불암 마애불상군

서쪽에는 칠불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다. 칠불암이 다른 암자와 다른 점이라면 법당에 부처님을 비롯한 어떤 불상도 모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마애불상군을 주불로 모시기 때문이다. 법당에 들어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서 보면 마애불상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다시 대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산길로 접어든다. 칠불암 마애불상군에서 산위로 약 200m여를 오르면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보물 제199호)을 만날 수 있다. 길은 조금 험한 편이다. 10년도 훨씬 이전, 처음 오를 때는 어둠 속을 들짐승처럼 기었다.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암벽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무작정 위를 향해서 네발로 기었다. 위험천만한 산행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도록 위험구간을 나무데크와 계단 등으로 정비를 마쳤다.

보살상을 가기 전 60m지점의 바위 위에 오르자 풍경이 일변하여 사방이 확 트인다. 멀리 토함산의 능선을 따라 줄지어 뿌리를 내린 풍력발전기 꼭대기로부터 커다란 날개 두 쌍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 너머로 여명이 터오는지 하늘이 불그스레하다. 발아래 저 멀리로 경주시내와 불국사, 울산을 잇는 도로에는 자동차 불빛이 꼬리를 문다. 울울창창한 숲속에서 부엉이가 '부엉부엉'운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부엉이 울음소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새벽산행이 가져다주는 축복의 선물 같다. 유년시절 고향서나 가끔 들었던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예서 듣다니 그동안의 세월이 야속이나 한 듯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일출 후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의 옆모습
일출 후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의 옆모습

◆구름위에 앉은듯 마애보살반가상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만나려면 다시 좁은 산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마애보살반가상은 위태한 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발밑을 굽어 내려다보자 한참 아래로 남산이 어둠 속에 잠겨있다. 하지만 일출 경 하나는 끝내주는 곳으로 비가오고 구름이 낀 날은 피하는 게 좋다. 절기상으로는 3월 중순에서 4월 초, 9월 중순에서 10월초가 최고다.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위에 앉아있는 듯 보인다. 불상의 높이는 1.4m로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 아래로 자연스럽게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아 발은 연꽃 위에 올려놓았다. 왼쪽다리는 가볍게 대좌위에 올려놓아 반가상의 자세를 취했다. 그 아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보살반가상의 조성 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으로 보인다고 한다.

마애보살반가상을 향해 합장을 하고선 천천히 둘러보는데 동녘하늘로부터 터오는 여명이 산고를 겪는 모양이다. 서쪽하늘에 노닐던 하현달이 꼴깍 넘어가고 남쪽하늘을 따라 곡선을 그려가던 개밥바라기(샛별로 금성)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나 저제나 태양이 떠 오기를 기다리는데 여명은 여전히 모진 산고를 겪는 중이다. 그 여파로 하늘중앙을 떠도는 구름 위로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묻어난다.

숨을 고를 겸 나무계단에 앉아 생수로 목을 축이는데 멧돼지 울음소리가 발아래서 '커~억 컥컥'울어 오른다. 날이 밝아 집으로 가자는 건지, 아침을 먹자며 집을 나서자는 건지 한껏 애가 타 보이는 울음소리다. 사이사이를 부엉이가 추임새를 넣듯 '부엉부엉'울어서 하모니를 이룬다. 숲속의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중이다. 어느 순간 딱따구리도 새벽잠을 반납했는지 나무를 쪼아 '따르르'한다. 헌데 보살상만은 희로애락을 초월한 표정으로 한없이 고요하여 입정(入定)에 들었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에서 내려다본 칠불암 전경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에서 내려다본 칠불암 전경

◆ 마애보살반가상과 일출 장관

문득 머릿속으로 떠오는 화두 하나가 있어 기어이 끄집어낸다. 그리고는 화들짝 내던졌다. "보살님 돈오돈수입니까? 돈오점수입니까?"하고 마음속으로 질문이다. 들었을까? 아니면 듣고도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뗄까? 그도 아니면 아예 못들은 걸까? 여전히 미동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하긴 석공예명장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손길아래 현세에 나투신 이래 현재까지 가사자락 한번이라도 펄럭인 적이 있었던가? 장삼자락에 묻은 티끌 한번 털어낸 적이 있었던가?

"이런 우매한 축생을 보았나! 그걸 왜? 내게 물어? 그걸 알면 사방정토에 들어 부처가 되었게"하는 듯도 하고 또 어떻게 들으면 지나가는 솔바람소리인 양 싶다. 하늘 가장자리론 구름무리가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흩어지기를 반복이다.

태양이 완연하게 세상을 밝혔다. 고위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산등성이가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러워서 선이 곱다.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 기암괴석이 눈에 현란하다. 그 아래로 질펀하게 펼쳐진 가을들판엔 가을빛이 완연하여 노란색 파스텔을 문질러 놓은 듯 상큼하다. 방울방울 영롱하게 이슬이 내리고 새벽안개가 길게 허리를 펴는 가을들녘이 주는 풍요로움에 절로 배가 부른 느낌이다. 철재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칠불암의 용마루가 한눈에 가지런하다.

문설주에 내 걸린 목탁
문설주에 내 걸린 목탁

칠불암에는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법당에서 제 몸을 불살라 사위를 밝히는 촛불만이 여전할 뿐이다. 와중에 문설주에 내 걸인 목탁만이 오매불망 주인을 기다리는지 한줌 바람에도 보일 듯 말 듯 눈을 들어 아래쪽을 향한다. 그새 칠불암도 어둠에서 완전히 벗어나 본연의 자태를 완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조용히 하산 길에 접어든다. 또 얼마나 내려왔을까? 스님 한분이 언뜻언뜻 올라온다. "기다리다가 따뜻한 커피 한잔 잘 마셨습니다."하자 빙그레 웃으시며 합장이다. 마주하여 합장인데 칠불암에 축대공사 등 여러 가지 공사를 펼쳐놓아 길이 바쁘다며 총총 걸음을 재촉이다. 스님의 뒤를 따라 솔가지사이로 번져나는 옅은 안개 속으로 태양빛이 내려앉고 낮은 둔덕 넘어선 아침을 여는 도랑물소리가 청아하게 일어 골짜기에서 자지러진다.

글·사진 이원선 시니어매일 선임기자 lwonss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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