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뉴욕, 베니스,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내가 최초로 혼자 떠난 여행지는 파리였다. 1개월 동안 열 명의 작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일이라 비교적 여유가 있어 나는 파리 곳곳의 크고 작은 미술관을 찾아다녔다. 가을이었다.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부르델, 들라크루아, 피카소, 달리, 로댕. 그리고 빅토르 위고, 로맹가리, 르블랑… 길을 걷다가 지치면 노천카페에서 코냑이 든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유유자적 파리의 소음도 즐겼다. 아, 보들레르와 수틴의 묘지를 찾아가 꽃을 놓기도 했다. 쓸쓸했지만 달콤삽싸름한 가을이었다.

그 이후 여유만 생기면 그렇게 한 도시를 정해 그 곳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혼자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이 일에만 매달려 헛헛해진 내면을 채우는 방법이라 여기며 지난 십여 년 동안 꽤 그렇게 다녔던 것 같다. 물론 한 번 다녀온 곳을 계속 간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우연히 같은 이름을 가진 여러 도시의 미술관을 다니게도 되었다. 구겐하임미술관이다. 뉴욕, 베니스, 빌바오, 세 도시의 미술관은 닮았지만 또 완전히 달랐다.

뉴욕 구겐하임
뉴욕 구겐하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눈 내리는 맨하탄 5번가 뮤지엄 마일(Museum Mile)의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작품이었다. 솔로몬 구겐하임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비구상 회화들을 위한 영혼의 사원(Temple of Spirit)'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자연과의 유기적 형태를 지향하던 이 건축가는 고대 바빌로니아 피라미드인 지구라트를 뒤집은 그 이상을 구현해 지었다. 엎어놓은 하얀 달팽이 껍질을 닮은 이 미술관 건물은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솔로몬의 취향대로 칸딘스키, 몬드리안, 브랑쿠시, 칼더, 샤갈, 클레, 미로, 피카소, 브라크, 라우센버그, 리히텐슈타인 등 20세기 거장들의 비구상 작품이 가득한 뉴욕구겐하임은 독특한 그 건축 외형으로 인해 '달팽이'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백남준, 이우환이 전시를 했고 김창열, 양혜규 등의 작품이 소장되어있다. 계단이 없는 뉴욕 구겐하임의 나선형 회랑을 돌며 '아메리카'라 명명된 마우리치노 카텔란의 황금 변기를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한 이는 솔로몬 R. 구겐하임이다. 그의 아버지 마이어 구겐하임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1847년 미국으로 건너와 광산과 제련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광산왕'이었다. 구겐하임 가문의 후손들은 그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는데, 넷째 아들 솔로몬은 자선사업과 현대미술을 지원할 목적으로 1937년 솔로몬 R. 구겐하임재단을 설립하고 이 미술관을 건립했다.

그것은 같은 예술적 취향을 가진 동생 벤자민이 1912년 타이타닉호에서 타인에게 구명복과 보트를 양보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은 영향도 있었다. 벤자민 구겐하임의 딸 페기는 250만달러(현재 3,410만달러)를 물려받은 상속녀로 1920년 유럽으로 갔다. 파리에서 마르크 뒤샹, 만 레이 등에게 초현실주의, 입체주의 등 현대미술의 흐름을 배우고, 샤무엘 베케트의 조언으로 당시엔 누구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초현실주의 계열의 작품들을 막대한 재력을 앞세워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베니스 구겐하임미술관
이탈리아 베니스 구겐하임미술관

◆베니스 구겐하임미술관

어느 해 여름, 곤돌라를 타고 카날 그랑데의 18세기 대리석 건물인 베니스구겐하임에 도착하니 마리노 마리아의 말을 탄 기사 청동조각상이 현관에서 맞아주었다. 미술관의 원래 명칭은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Palazzo Leoni, 사자들의 궁전), 페기 구겐하임이 1942년 이 집을 사서 1979년 죽을 때까지 30여 년 살았던 저택이다. 그녀의 무덤은 저택 한 켠 기르던 개 14마리와 나란히 있다.

페기 구겐하임은 2차 세계대전 와중 파리에서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찾아다니며 전쟁이라 헐값에 나온 그림들을 미술 중독자처럼 '하루에 하나씩' 말 그대로 긁어모았다. 그러면서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아 나치에 쫓기는 다수의 미국 망명을 돕기도 하고, 파리에서 사 모은 작품들을 미국으로 극적으로 공수해 세계 미술의 중심지를 파리에서 뉴욕으로 바꾸기도 했다. 말하자면 세계현대미술사의 큰 흐름을 그녀가 바꿔버린 것이다.

남성편력이 심해 다소 방탕한 그녀의 탁월한 안목과 감각은 실로 놀라울 정도인데, 히틀러의 파리 점령이 임박해져 루브르미술관 측에 부탁한 자신의 컬렉션 보관이 거절되자 이렇게 말한다. '루브르 측은 내가 가진 그림은 보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공간을 내주기를 거절했다. 그들이 보존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그림은 칸딘스키, 클레와 피카비아, 브라크, 후안 그리스, 레제… 몬드리안의 작품이었다. 초현실주의 작품 중에서는 미로, 막스 에른스트, 데 키리코, 이브 탕기,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와 빅토르 브라우너도 있었다. 또한 브랑쿠시, 자크 립시츠, 앙리 로랑스, 페프스너, 자코메티, 헨리 무어, 아르프도 있었지만 루브르 측은 그것들을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생전에 백부인 솔로몬과 견해 차이로 불화도 있었지만 페기는 죽으면서 저택과 자신의 모든 작품을 솔로몬 R. 구겐하임재단에 기증했다. 그녀의 사후 저택은 뉴욕구겐하임 베니스 분관으로 생전의 전시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 페기의 침대 머릿장으로 쓴 콜더의 실버 모빌 아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선생님 설명에 흠뻑 빠져 있다. 아이들이 앉은 배경의 창 너머로 미로의 작품이 보이고 그 앞에 브랑쿠시가 있다. 옆 전시실에는 달리, 자코메티, 무어, 피카소가, 중앙홀에는 마크 로스코와 그녀가 생전에 발굴해 미국의 거장으로 만든 미술관 목수였던 잭슨 폴록의 작품이 있다.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를 세계무대로 불러 낸 것도 페기 구겐하임이었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스페인 북부 비스카야만의 빌바오구겐하임은 기둥이 없는 철골구조다. 메탈릭 플라워(Metallic Flower), 3만3천개 티타늄 비늘이 빛의 굴절인지 꽃봉오리처럼 너울거렸다. 역시 곡면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다.

뉴욕구겐하임 관장 토마스 크랜스는 스스로 철학은 없고 전략이 있을 뿐이라 공공연히 내뱉는 사람이었다. 미술관을 기업처럼 운영하는 그와 쇠락한 철광도시의 옛 영화를 재현하고 싶은 바스크정부 그리고 스페인 당국의 목적이 맞아 떨어져 빌바오구겐하임은 1997년 개관됐다.

빌바오구겐하임 플라자에는 계절마다 꽃과 풀로 새 옷을 갈아입는 제프 쿤스의 거대한 강아지 퍼피가 스핑크스처럼 서 있다. 올덴버그의 헝겊꽃, 리히텐스타인, 로센퀴스트, 홀처의 설치작품들과 특히 녹 냄새를 풍기는 세라의 철판 설치작품은 빌바오의 이름이 유래된 강철검 빌보스를 떠올리게도 한다.

투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전시실에는 구겐하임 분관답게 그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살베다리를 배경으로 부르주아의 마망, 테라스에 펼쳐진 쿤스의 튤립, 카푸어의 거대한 나무, 그러고 보니 이곳의 외부설치작품들은 모두 거대하고 그 소재가 철이다.

뉴욕, 베니스, 빌바오, 세 도시의 구겐하임미술관은 내게 와인 첫 모금을 마실 때의 기쁨을 안겨준 곳들이다. 뉴욕에서 마신 늑대머리 레이블의 잭 런던, 베니스 트레비조 와이너리의 프로세코, 바스크의 빌바오 크리안자 그리고 치즈와 하몽들, 다시 그립다. 코로나가 사라지면 나는 필히 달려서 다시 그곳으로 갈 것이다.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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