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개국과 함께 국조(國祖) 단군(檀君)을 섬겼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영조, 정조 당시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먼저 태조 1년(1392) 8월 11일 기사는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평양부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태조 3년(1394) 8월 24일에도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라며 나라의 단군 기원(起源)을 밝혔다. 태조 6년(1397) 3월 8일 기록은 "…황막한 그 옛날, 단군이 단목가에 강림하시어, 동쪽 나라 왕위에 오르시니…조선(朝鮮)이라 이름하였소"라는 내용을 싣고 단군의 후손임을 밝혔다.
영조 1년(1725) 8월 7일자는 "평양부에 소재한 단군전(檀君殿)의 편액에 대한 호칭을 '숭령'(崇靈)으로 하라고 계하하셨습니다.…편액을 걸 때에 제사하여 고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본조의 낭청이 향축(香祝)을 가지고 내려간 뒤에 즉시 거행…"이라며 제사 기록을 남겼다. 정조 3년(1779) 1월 23일에는 "단군묘(檀君廟)에…승지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라고 명하였다"며 단군 제사 사실을 전했다. 이는 고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 국조 단군을 밝힌 기록과도 상통한다.

◆일제 탄압 대종교로 개칭
조선의 후손들, 특히 일제 침탈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은 더욱 단군을 섬겼다. 개국의 기틀을 다질 때처럼 망국(亡國)을 다시 일으키는 독립전쟁에 나섰으니 단군을 받드는 일은 피할 수 없었으리라. 나철(羅喆·독립장)이 단군을 기린 종교를 창시할 만도 했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관직을 벗고 1907년 을사오적 처단에 실패한 뒤 처벌에서 벗어나자 단군 계열의 신교(神敎)와 상통하는 단군교(檀君敎)를 1909년 1월 15일(음력) 창시(創始), 스스로 '아국고유종교'(我國固有宗敎)라고 천명했다. 그는 서울 자택에 '대황조단군신위'(大皇祖檀君神位)를 붙이고 제례를 지냈다. 단군교는 곧 일제 탄압으로 1910년 9월 단군을 뺀 대종교(大倧敎)로 개칭됐다. 1월 15일을 '단군의 신교를 중흥했다'는 뜻에서 중광절(重光節)로 불렀다.
그러나 대종교는 설립 이후 1942년 일제 대탄압이 자행된 임오교변(壬午敎變)까지 끊임없이 억압에 시달렸다. 특히 1911년에는 골수 친일파 박중양(朴重陽) 충남도장관의 밀고로 충남 공주지역 대종교 입교자 감시 및 탄압(공주시교당사건)을 계기로 대종교 시련은 법의 규제로 본격화됐다.
그렇지만 대종교의 전파는 이어져 1910년 10월 만주지사를 두고 1914년 1월 대종교 총본사를 만주로 옮겼다. 또 항일 무장단체인 중광단(重光團) 설립, 학교 운영 등 독립운동도 활발해 30만명 신도에 이르렀고 탄압 역시 가중됐다. 결국 나철은 1916년 8월 15일(음력)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진(自盡) 순국·순교로 맞섰고, 만주 중심의 대종교 저항과 독립운동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대종교 대탄압인 1942년 11월 19일 임오교변 때는 안희제(安熙濟·독립장) 등 10명이 옥사 순국했고, 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독립장) 등이 투옥됐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1914년 본사 만주 이전 이후 교세를 넓힌 대종교의 간부 25명을 체포했다.
이런 활동으로 대종교는 독립운동단체로까지 평가된다. 박영석 연구자는 "대종교가 순수한 종교면 보다는 대일 항쟁에서 방략상 단군교를 창립(중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이 사실은 그후 항일 독립운동의 업적을 통하여 그대로 입증된다"고 지적했다.

◆대종교 출신 독립운동가
대종교를 믿은 독립운동가는 숱하다. 특히 만주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드넓은 중국 땅은 국조(國祖) 단군이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B.C37~668)와 발해(698~926)가 호령했던 연고지여서 대종교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종교는 독립운동을 뒷받침한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종교로 독립운동을 펼친 서훈 인물에는 먼저 나철 창시자가 있다. 또 나철 뒤를 이어 대종교 전파에 기여한 2대 교주 김교현(金敎獻·독립장)과 3대 교주 윤세복도 있다. 친형 윤세용(尹世茸·독립장)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함께한 윤세복은 대구와도 일찍부터 인연을 맺은 인물이었다.


경남 밀양 출신 윤세복은 1906년 대구에서 3년간 측량기술을 익혔고, 1907년 대구 협성학교 교사로도 일했다. 또 1908년 임시재원조사국 양지과 대구출장소 기수로 임용됐다. 1909년 결성된 대동청년단에서 대구사람 서상일(徐相日·애족장) 등과 만났다. 윤세복은 또한 1910년 대구 달성친목회 청년체육구락부 설립 때 발기인이었고 1912년 중국에 망명, 대종교 활동 및 독립운동을 펼쳤고 광복 이후에는 홍익대학교 설립에도 힘썼다.

상해 임시정부 조직에도 참여했다. 임시의정원 29명 의원 가운데 의장 이동녕(李東寧·대통령장) 등 21명, 정부 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각각 대종교 원로였다. 아울러 임시정부 공식 군사기관인 북로군정서 서일(徐一·독립장) 총재를 비롯,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대한민국장)과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대통령장) 등 여럿도 교인이었다. 북로군정서와 함께 1920년 10월 일본군에게 청산리대첩을 거둔 대한독립군 지도자 홍범도(洪範圖·대한민국장) 역시 대종교 신도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李相卨·대통령장), 대종교 서도본사 책임자 신규식(申圭植·대통령장), 기독교에서 개종한 국어학자 주시경(周時經·대통령장), 사학자 박은식(朴殷植·대통령장)·신채호(申采浩·대통령장) 등도 교인이자 당대 널리 알려진 애국지사였다.
대구경북 출신으로는 대동청년단의 남형우(南亨祐·건국포장·고령) 단장과 단원인 서상일(徐相日·애족장·대구), 이경희(李慶熙·애국장·대구), 김동삼(金東三·대통령장·안동)을 비롯해 초대 국무령 이상룡(李相龍·독립장·안동)과 1926년 6·10만세운동 주동자 권오설(權五卨·독립장·안동) 등이 있다.
한편 1915년 1월 15일(음력) 대구 앞산 안일암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은 "우리 조선이…망했으니 우리 시조 단군대황조에 미안한 일이니 어떻게 해서든 독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매년 정월 15일 단군의 위패 앞에서 목적 수행을 기도할 것'이라 맹세하며 단군을 기렸는데, 대종교와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