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실인 '일오처'(逸悟處)에는 그저 개인적인 기준에 불과하지만, 보고 있으면 그냥 좋은 작품이 하나 있다. 명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에는 모종의 통통한 여름 냄새가 난다. 그림이 아닌 붓글씨다.
'모내기 3의1 권소정 영주동부국민학교'라고 단출하게 쓴 게 전부인 붓글씨다. 초등학교 3학년 글씨다. 3의1, 3학년 1반이라는 뜻이다. 오른쪽 세로에 '모내기'라고 쓰였고 왼쪽 세로에는 어눌한 정감이 밟혀오는 낙관이 있다.
학년과 학교를 쓴 글씨의 자간과 행간 사이에 이 작품을 취득한 친구가 그 과정을 깨알처럼 기록해 놓았다. 1994년, 정확히 27년 전의 일이다. 읽으면 흐뭇해지는 발문 전체를 옮긴다.
"이것은 일천구백구십사년 유월이십구일 영주청년회의소가 주최한 백일장에서 쓴 글씨다. 그 때 묻지 않은 천진스러움이 사랑스러워 문득 갖고 싶은 마음에 주머니에 넣고 돌아와 다시 펼쳤다. 이것을 얻은 기쁨, 어디에 견줄 바 없이 마음을 감동시킨다.
그러나 이 또한 욕심인가 여겨져 마주대하기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심정이 더욱 아쉬운 것은 심사를 하면 틀에 박힌 대동소이한 대부분의 글씨를 챙기느라 이렇게 신선한 정감을 주는 것을 심사대상에서 제외시켜야만 했던 안타까움이다.
정녕 우리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해가 비추면 비추는 대로 거짓 없이 자라날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인지 생각하면 아득하다. 나의 기성사고의 무지함에 부끄러운 무게를 더할 뿐이다."
이렇게 서예가인 친구는 백일장에서 낙선한 꼬마의 작품 속에 자신의 속마음을 오버랩시켰다. 유년기의 작품을 두고 흔히 우리는 명작이라고 하지 않는다. 아마 사회성 결여가 그 이유일 것 같다. 글씨의 크기와 자간, 행간은 삐뚤빼뚤 격이 없고 틀이 없다. 단순하고 소박하다. 더불어 조화롭고 담담하다.
큰 기교는 마치 서툰 듯하다. 이런 예술의 경지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의미다. 유년의 꼬마가 서툴고 큰 기교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진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모내기'라는 세 글자를 마냥 대교약졸로 윤색하고 그렇게 번안해 읽는다. 유년부터의 자의적이고 고약한 습관이다. 화가가 된 지금, 더 나은 차원의 내가 되기를 소망하는 함의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타인과 우선을 다투는 일이 성가시고 별 흥미가 없어질 때 '모내기' 글씨를 본다. 번잡한 논리는 어울리지 않는 야릇하고 통통한 여름 냄새가 난다. 공들여 흘려놓은 천진한 꼬마의 땀 냄새도 나고, 더불어 친구의 안목이 내 붓의 질긴 근육으로 전이된 획도 보인다. 하나의 작품에서 두 사람의 풍경을 동시에 이식하는 일이니 그 향기는 더욱 진하다.
3학년 꼬마는 이제 30대 후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도 서른 번이 훌쩍 넘는 여름 냄새를 맡았을 것이고 서른 번의 초록착색이 낙엽으로 바뀌어 가는 가을의 초입을 구경했을 것이다. 나에게 소박한 깨달음을 준 그 꼬마는 지금 무엇을 할까.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