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멋대로 그림읽기] 정지현 작 '두 개의 빛' 한지에 목탄 165x130cm 2021년

삶은 흔히 길에 비유된다. 누구는 쭉 뻗은 넓은 길을 평탄하게 슬렁슬렁 걷는가 하면, 누구는 구비 길에 가파른 오르막길을 힘겹게 걸어 올라야 한다. 게다가 등엔 무거운 짐을 한껏 얻은 채 말이다.

정지현 작 '두 개의 빛'은 흑과 백의 두 빛을 이용해 한지에 목탄으로 그렸다. 한 노인이 이미 어둠이 점령한 골목에 접어들어 하루종일 그러모은 넝마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있다. 저 멀리 골목 안쪽엔 가로등이 흘려 내린 빛줄기가 어둠 속 이정표처럼 노인이 가야할 길을 안내하고 있다. 노인의 행색으로 보아 계절은 겨울인 듯 한데, 삶의 무게에 굽어진 등을 가린 옷차림새는 얇아 보인다. 다만 리어카에 수북한 넝마는 노인의 하루 노동의 결과물이자, 한 끼를 때워줄 양식으로서 화면 속에서 가장 밝게 표현돼 있다.

사실 예술작품은 시대적 요인과 개인의 체험이 섞여 나타나는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경험이 다양할수록 작품도 더욱 다채로운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특히 미술 분야의 객관적·사회적 환경의 흐름 속에서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것은 작가의 내면에 내재된 시대정신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미술이 온전히 심미적이거나 아름다운 대상만을 추구하는 건 결코 아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지독한 개인적인 고통, 전쟁의 비인간성, 타인으로 인한 지옥 같은 삶, 실존적인 불안 등등 수없이 많은 삶의 어두운 측면들 역시 그림의 대상이다.

만일 작가가 이 작품을 유화나 수채화로 그렸다면 어떠했을까. 노동, 삶의 무게, 탈진한 몸을 눕힐 누추한 거처로의 길 등 이 작품이 쏟아내고 있는 여러 이미지가 이처럼 잘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정지현은 장지에 목탄을 써서 '두 개의 빛'을 작업함으로써 그 어떤 물성(物性)을 이용한 작품보다 더 뛰어나게 그가 의도한 이미지를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술에서 작품에 쓰이는 물성이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작가의 기교와 재능에 박수를 보낸다.

"일상적인 것의 어느 부분을 도려내서 작업으로 옮길 것인지 생각하고 선택하는 일은 언제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직사각형의 하얀색 종이에 처음 선을 그으면서도 내 선택이 최선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정지현의 이 말은 창작의 고통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기, 재료, 소통의 문제와 같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문 속에 작가는 언제나 혼자이고, 또 그 고독의 굴레를 벗어나야 하는 운명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비 길에 가파른 오르막길도 자꾸 가다보면 쉼터도 나오고 조금 편한 길도 있기 마련이다.

'그림 속 무명의 노인이시여! 힘을 내시라! 신(神)이여! 부디 간절히 바라오니 저 노인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꾸라지는 일이 없도록 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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