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재현장] 400년 만의 유림사회 화합 이어지길

퇴계의 후손들이 호계서원 사당인 존도사에 복설됐던 퇴계 위패를 사당과 서원 밖으로 모셔나가 불태워 땅에 묻는 소송(燒送) 절차에 나섰다. 엄재진 기자
퇴계의 후손들이 호계서원 사당인 존도사에 복설됐던 퇴계 위패를 사당과 서원 밖으로 모셔나가 불태워 땅에 묻는 소송(燒送) 절차에 나섰다. 엄재진 기자
엄재진 경북부 기자
엄재진 경북부 기자

"나라에 우환이 있어 추향을 모시지 못하게 됐음을 포와 과일을 올리고 고(告)하나이다."

지난 3일 이른 아침 안동 도산면 서부리 국학진흥원 옆 산자락에 들어선 '호계서원'(虎溪書院·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사당인 존도사(尊道祠)에서는 10여 명의 유림들이 엎드려 고유제를 올렸다.

호계서원은 지난해 11월 복원되면서 400년간 이어오던 '병호시비'(屛虎是非)에 종지부를 찍고, 종손들과 유림 사회의 '위차'(서열) 합의에 따라 존도사에 퇴계·서애·학봉 선생 위패에다 대산 선생 위패를 추향했다.

조선 선조 6년 1573년에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호계서원은 인조 3년 1625년에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을 추가 봉향했다. 영조 43년 1767년에 사액됐다.

퇴계의 제자인 서애와 학봉을 배향하면서 퇴계 좌측(상위)에 누구의 위패를 놓을 것인가를 두고 문제가 불거지면서 문중과 제자들 간 3차례 시비가 빚어졌다. 이를 '병호시비'라 한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임하댐 아래로 옮겨졌지만 습기로 건물 훼손이 우려되자 지역 유림은 다시 이건(移建)과 함께 서원 복설을 추진, 경북도는 2013년부터 총사업비 65억 원을 들여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고 위패를 복설했다.

하지만, 지난달 30일 퇴계 종가인 상계문중을 중심으로 한 후손들이 호계서원 존도사에 배향된 퇴계 선조의 위패를 밖으로 모셔나가, 계상서당 뒤편에서 위패를 불살라 땅에 묻었다.

상계문중은 서원의 위치와 위패 봉안에 대해 예안 지역 유림 사회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데 대해 우려를 밝혔다. 예안 유림들은 호계서원 복원 이후 지속적으로 '중복적 위패 복설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는 등 문제를 제기해 왔다.

사풍 진작에 힘써야 할 서원이 시비와 분쟁의 장소가 되고, 시비와 갈등이 있는 곳에 선조의 위패를 모시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불효함을 언급했다.

선조의 위패 봉안이 유림 간 새로운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음에 퇴계 위패를 서원에서 모시고 나감으로써 갈등의 요소를 없애겠다는 종손과 후손들의 결단이었다.

퇴계 위패가 서원 밖으로 나가면서 400년간 이어온 병호시비에 종지부를 찍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또 다른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 유림 사회는 또 다른 걱정과 갈등이 되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다.

스승인 퇴계의 위패가 빠져나간 사당에 제자인 서애·학봉과 대산의 위패만 모셔진 데 대한 회의적 시각도 나오고 있다. 모 유림 어르신은 "스승이 나간 집에 제자들만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라며 씁쓸해했다.

한편, 상계문중운영위원회의 성급한 결단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유림도 상당하다.

"조선 500년 역사에 왕명에 의하지 않고 주벽(主壁)의 위패를 퇴위한 경우는 없다. 경북 유림들의 공의에 의해 복설됐다. 석연찮은 논리에 의해 수많은 공론과 대의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안동의 한 유림은 "위패 복설 문제는 유림 사회의 공의와 합의에 의해 처리된 것"이라며 "자칫 안동을 비롯한 영남 유림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전해지지 않도록 발 빠른 대책 마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호계서원 운영, 위패 봉안과 추향 문제는 영남 유림 사회 공의로 가능하다. 어느 한쪽의 주장과 폄훼로 가치와 의미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자칫 새로운 갈등으로 번질 것을 경계해야 한다. 400년 만에 이뤄진 화합된 영남 유림 사회가 이어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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