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세 개의 이름을 가진 도시,이스탄불

동서양이 공존하는 도시…눈 닿는 곳엔 모스크 첨탑
로마·비잔틴·오스만 3대 제국 수도 1528년간 기독교·이슬람 함께 존재
도시 전체 유네스코 문화도시 지정

터키 이스탄불은 역사와 문명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도시로 지정되어 있다.아야 소피아 외부모습.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터키 이스탄불은 역사와 문명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도시로 지정되어 있다.아야 소피아 외부모습.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어렸을 때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내 뒤에 앉은 같은 반 친구는 예방주사를 맞을 때마다 심하게 울던 아이였는데, 그 친구가 하루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집에 놀러 갈래. 친구네 집 툇마루에 내리쬐는 햇살은 따뜻했고 햇고구마의 따뜻한 냄새와 촉감이 아직도 아련한데 어쩌다 길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기억은 도통 나지 않는다.

그렇게 길을 잃고 무서워 울면서 계속 좁은 골목을 걷고 또 걸었던 기억만 난다. 그날 습하고 그늘진 퇴락한 동네의 길은 여러 갈래로 계속 갈라졌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낯선 곳이 나타나곤 했다. 마치 나쁜 꿈 같았다. 다행히 이웃 아주머니를 만나 무사히 귀가했지만 그 이후부터 나는 감기나 몸살이 들면 늘 그 꿈을 꾸었다.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 양안을 두고 동쪽의 소아시아지구와 서쪽의 발칸반도를 면한 유럽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이스탄불은 보스포루스 해협 양안을 두고 동쪽의 소아시아지구와 서쪽의 발칸반도를 면한 유럽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이스탄불, 동서 인류문명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옥외박물관

이스탄불에서의 첫 밤, 그 꿈을 꾸고 말았다. 전날 해질녘 도시에 들어섰을 때 본 그 비감스러운 폐허 탓일 것이다. 도로가에 무심하게 방치된 무너진 성벽과 거대한 기둥 그리고 물때가 잔뜩 낀 오래된 집들은 비잔티움이나 콘스탄티노플 또는 트라키아시대에 축조된 것이니 웬만하면 천 년 이상은 넘은 것들이라 했다. 내 꿈의 근간이 읽혔다.

이스탄불 태생으로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태생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스탄불이 순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불완전하며, 폐허가 된 건물들의 더미이기 때문에 좋아한다.' 그는 낡고 잊혀지며 사라져가는 몰락한 제국의 비애에 짓눌린 듯 글을 쓴다.

어느 모스크의 첨탑에서 흘러나오는 무아딘(기도 시보원)의 아잔(Ezan)이 애절하다. 세계에서 유일한 아시아와 유럽의 접점이자 지중해와 에게해에서 흑해로 진입하는 다르다넬스와 보스포로스해협에 인접한 이 도시의 운명과 그 애달픔에 신의 가호를 비는 것일까. 실크로드 육로의 서쪽 끝이며 동서문물의 집산지로 3천년이 넘은 이 도시가 겪은 환난과 재앙은 그 어떤 상상도 뛰어넘을 것이다. 기도하러 오라. 구원받으러 오라. 아잔 일곱 구절의 정형구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기원전 667년 고대 희랍 메가라의 왕 비자스가 델피의 신탁으로 도시를 세웠다. 도시의 이름은 비잔티움이었다. 그후 이곳은 로마와 비잔틴, 오스만 3대 제국의 수도로 무려 1,528년 동안 122명의 통치자에 의해 존속되었다. 이 긴 시간동안 기독교와 이슬람, 동서문명의 접점이 된 도시를 문명사가 토인비는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옥외박물관'이라 했다.

이른바 역사와 문명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이스탄불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도시로 지정되어 있다. 1923년 '터키의 아버지' 케말 파샤(아타튀르크)에 의해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의 기능은 앙카라로 옮겨졌지만 이스탄불은 여전히 터키 제 1의 도시다.

에게해와 흑해 사이라고 했지만 이스탄불은 정확하게는 마르마라해와 흑해 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 양안의 도시, 더 정확하게는 동쪽의 소아시아지구와 서쪽의 발칸반도를 면한 유럽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유럽지구는 골든 혼을 경계로 신시가지, 구시가지로 나누어진다.

신선한 야채와 치즈, 요거트로 만든 터키식 아침식사인 카흐발트(Kahvalti)를 먹고 나간 술탄 아흐마드 광장에는 경마와 전차경주가 벌어졌던 고대 그리스의 원형경기장인 히포드롬이 있었다. 390년 비잔틴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 룩소 카르낙 아몬신전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와, 기원전 479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델피의 아폴로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청동뱀이 서로 몸을 감고 올라가는 기둥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제국의 황제들은 이것들로 자신의 위용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터키 이스탄불은 기독교와 이슬람, 동서문명의 접점이 된 도시이다.아야 소피아 외부모습.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터키 이스탄불은 기독교와 이슬람, 동서문명의 접점이 된 도시이다.아야 소피아 외부모습.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성(聖), 속(俗)이 혼재된 도시

성 소피아(그리스어로 하기아 소피아, 터키어로 아야 소피아) 박물관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건축된 뒤 화재와 지진, 전쟁으로 파괴되어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솔로몬이여, 나 그대를 이겼노라.' 헌당식에서 그가 이렇게 외칠 만큼 비잔틴양식의 중앙 돔과 수많은 보조 돔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장중하고 아름답다. 당시 성당을 다녀간 한 러시아 성직자는 성 소피아가 천국의 모습을 하고 있더란 기록도 남겼다. 하지만 이곳은 향후 이스탄불에서 가장 극명한 두 문명의 접점상을 보여주게 된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마호메트 2세가 점령 3일 만에 이슬람식 금요예배를 근행했다. 다행히 그는 동방정교회의 오색영롱한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초기기독교, 비잔틴시대 황제나 주교들의 9세기 모자이크 성화를 부숴버리는 대신 회로 덮고 칠하여 다만 미흐랍(메카 쪽 예배방향을 알리는 벽감)과 민바르(설교단), 미으잔(예배시간을 알리는 첨탑)을 증축해 모스크로 삼았다. 19세기 압둘메지트 1세 때 서예가 에펜디가 도안한 알라와 칼리파 등의 이름을 금으로 새긴 거대한 원판 9개가 걸려 있다.

90여 년 전 아타튀르크가 국교를 없애고 세속주의 정책을 천명하며 이곳을 박물관으로 공개할 때 성화와 장식에 가했던 덧칠을 벗기고 원상복원시키며 누구나 신발을 신고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나는 그 동서 공존의 화합에 감탄하며 복원된 모자이크와 역대 황제들이 대관식을 올린 옴팔리온(세계의 배꼽) 앞에서 오래 경의를 표했다.

아, 그런데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이 지난 2021년 7월 10일, 엄혹한 지진도 비껴간 그 박물관의 지위를 행정명령으로 박탈하여 모스크로 변경하고 말았다. 조국의 과오를 공개비판하여 테러 위협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체류하는 오르한 파묵은 이렇게 한탄했다. '나같이 세속적인 터키인 수백만이 이에 반대하며 울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 모든 관광객들도 이곳에 들어갈 땐 신발을 벗어야 한다.

성 소피아 건너편에 블루 모스크가 있다.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가 정식 명칭이다. 오스만풍으로 내부의 푸른빛 타일은 녹색 타일과 함께 햇빛에 빛날 때의 아름다움으로 통칭 블루 모스크라 부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높은 언덕에 위치한 오스만 건축가 미마르(건축가) 시난이 만든 슐레이마니예 모스크가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지 않고 단순해서였다. 가까이 슐레이만의 영묘가 있으며 근처에 시난의 묘도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의 제자들이 블루 모스크와 무굴제국의 타지마할을 설계했다고, 역시!

실크로드 육로의 서쪽 끝이며 동서문물의 집산지인 이스탄불 그랜드바자르.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실크로드 육로의 서쪽 끝이며 동서문물의 집산지인 이스탄불 그랜드바자르.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이스탄불의 하얀 달

성 소피아에서 걸어서 5분, 해안가 끝자락에 오스만제국의 궁정 톱카프 사라이가 있다. 화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와 황금 새장으로 기대했던 왕비와 후궁들의 거처인 하렘(harem)은 방마다 쳐진 굵은 쇠창살창로 섬뜩하다. 궁전의 보물관에는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진주가 가득한데 그 중 86캐럿 다이아몬드는 이것을 주운 어부가 스푼 3개와 바꾸어 '스푼 장수의 다이아몬드'라 불린다. 3.26kg의 에메랄드가 박혀있는 톱카프의 황금단검, 250kg 황금의자와 술탄 가족들의 의복과 중세 원고 축쇄판이 너무 예뻐 나는 보고 또 보았다.

서유럽문화를 좋아했던 술탄 압둘메지트가 베르사유궁전을 모티브로 로스차일드가문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지은 '정원으로 가득찬 궁전' 돌마바흐체 사라이는 신시가지에 있었고 역시 하렘이 존재했다. 이곳에서 아타튀르크가 운명했는데 궁전 내 모든 시계는 그의 임종시간인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으로 고정되어 있다.

바실리카 또는 가라앉은 궁전으로 불리는 물이 차 있는 동로마시대의 지하 저수궁전은 메두사의 머리를 받침돌로 썼다. 제우스가 헤라의 질투를 피해 소로 변신시킨 이오가 건넌 보스포루스해협, 트로이, 히타이트와 아케메네스, 알렉산드로스, 사산왕조, 사라센제국, 셀주크, 몽골, 십자군 그리고 오스만튀르크… 이 끝없는 전쟁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고 피스타치오나무 뒤로 이스탄불의 하얀 달은 떠올랐다. 그 매일의 증거처럼 5천개가 넘는 상점이 그랜드 바자르 미로마다 들어○차 있었다.

나는 사실 이스탄불에서 혼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옛 화려함은 퇴색되었다지만 파리에서 출발하는 오리엔트특급의 종착지 사르케지역과 아가사 크리스티가 묵으며 『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을 집필했다는 페라팔라스호텔의 411호실이다. 일행과의 일정 때문에 결국 가지 못한 아쉬움을 야경이 휘황찬란한 탁심 거리로 나가 노면전차 튀넬도 타고 호텔 루프탑에서 이스탄불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달랬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꼭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오리라.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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