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집단속에 있는 개인은 불구다

권기철 화가
권기철 화가

참 다행이다 싶다. 오직 붓만 들고 있는 나의 무모한 삶 말이다. 예술적 허세 같지만 사실이다. 꽤 오래전 개인전 뒤풀이에서 있었던 짧은 에피소드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작가들이 저마다의 경계가 흥청거릴 때였다. 느닷없이 먹물안경을 낀 선배가 일어나 좌중을 주목시켰다. 그는 흔히 말하는 전업 화가였다.

오른손을 마이크 삼아 예의 그 왼쪽다리 떠는 습관을 추임새로 내게 일갈했다. "야! 권 또라이, 선배를 물로 보지 말고 흠,흠,흠… 알겠냐?"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단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또 하는 익숙한 레퍼토리다 싶어 곧장 나는 "그래, 까봐라 형"하고 불손한 대거리를 했다. 비비는 언덕 같은 화가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윽고 하는 그의 말이다. "촌으로 밀려간 지 10년, 이제야 작업실 앞에 산이 보이더라"고 했다. 그림 그리는 어떤 방법의 속사포 같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 말의 메타포를 금세 낚았다. 그는 이 말을 불쑥 던지고 습관대로 댕강댕강 동요를 불렀다. 나의 취기는 거기서 멈췄고 자리를 슬그머니 떴다.

그의 작업실 앞의 산 이름이 궁금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그때 나는 가창으로 작업실을 옮겨 몇 해를 건너가던 때라 모종의 연대감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한없이 개인적인 밀실로 최적화된 곳이 나의 작업실이다. 그야말로 안락한 경계다. 그러니 집단이나 단체가 어쩌면 흥미없는 건 당연하다. 사람이 많은 때와 장소가 불편하게 턱턱 걸리고 늘 따분하다. '집단'이라고 입력되면 '통속'이라는 고정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낯선 여행지의 첫날 첫 숙소에서 배낭을 깔고 하루를 소급하는 방식은 이렇다. 노트 위에 첫 문장을 '집단 속에 있는 개인은 불구다'라고 먼저 쓰고 짧은 하루의 서사를 옮긴다. 그리고 벌렁 누워 음악을 듣는다. 오래전 평론가 남재일의 책에서 읽고 '그래 이게 나야' 하면서 가져온 글이다. 좋아하는 문장이니 꼭 그렇게 기록한다. 지금도 집단을 그렇게 생각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럼요 내 밀실에서 듣는 에릭 사티 음악은 또 어떻구요"라고 살짝 비켜 말하고 싶다.

아무튼 집단을 벗어난 전업 작가는 골치 아픈 삶이다. 어느 날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후배가 "그림만 그린다고요? 그기 가당키나 한 말인교…"라고 하면 나는 그 말이 귀찮아 "좋아서 하는 짓인데 뭘" 하고는 건조하게 말허리를 자른다.

통과의례를 담보하는 일정 기간이란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가능한 혹독하게 체득하면 그림 또한 좋아진다고 믿는다. 붓에 견고한 근육이 붙고 물감에도 읽혀야할 당위가 생기니 말이다. 자신을 건실하게 진화시키는 방법으로 이만한 놀이가 있을까. 어찌 보면 '그림만 그리고 사는 일'은 꽤나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눈치채야할 것 또한 있다. 신나는 일에 자신의 균열이 더 많은 까닭은 고독하고 때에 따라 슬픔이란 위중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걸 놓치면 신나는 일은 없다. 비루한 오늘과 통속한 내일만이 있지 않을까? 무던한 앞산을 보며 갖는 나의 짧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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