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관계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라면 두 번째로 중요한 관계는 중·일 관계다." 지난해 12월 타계한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저서 '중국과 일본'에서 이같이 지적했다. 그는 1991년 '네 마리의 작은 용'이라는 표현을 처음 썼고, 일본의 군 위안부 역사 왜곡도 비판했던 미국의 대표적 동아시아 전문가다.
그의 통찰은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관계가 '혈맹' 미국과 관계라면 그다음 중요한 관계는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중국·일본과 관계다. "중·일 관계는 긴장되고 위태로우며 심오하면서도 복잡하다"는 그의 명쾌한 정리 역시 이들 세계 2, 3위 경제 대국 틈새에 낀 우리의 고단한 역사와 상통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얽힌 한·중·일의 갈등은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 같다. 한·중은 일본 군국주의 피해자란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사드(THAAD) 보복, 동북공정(東北工程) 등을 두고 마찰이 적지 않다. 중·일은 한·일 사이 독도 문제만큼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영유권을 두고 맹렬하게 으르렁댄다. 북한이란 변수도 빼놓을 수 없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매듭을 단칼에 잘라 속 시원히 해결할 순 없겠지만 삼국은 매듭을 푸는 데 별 관심이 없다. 특히 한국은 중·일 모두로부터 '덜 중요한 국가'로 평가받는 듯한 모양새라 안타깝다. 지난 1월 부임한 주일 한국대사는 아직 일본 총리는 물론 외무상조차 만나지 못했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한국 정부의 애타는 러브콜을 외면하고만 있다.
내년 10월 3연임에 나서는 시 주석, 얼마 전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한국 푸대접'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기시다 총리는 취임 이튿날부터 미국·호주·러시아·중국·인도 정상과 연달아 통화했지만 문재인 대통령과는 아무런 교신을 하지 않고 있다. 한·일 정상회담은 2019년 12월 이후 2년 가까이 열리지 않고 있다.
더욱이 그는 지난 8일 첫 국회 연설에선 양국 간 답답한 미래를 예고했다. 약 6천900자 분량 연설문에서 "한국은 중요한 이웃 나라"라면서도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나라의 일관된 입장에 토대를 두고 한국 측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하겠다"고만 언급했다. 관계 회복 의지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 외교가 이렇게 무력해진 것은 상대국의 고압적 자세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현 정부가 감상적 민족주의에 집착한 자업자득이다. 국익 최전선에서 뛰는 외교관마저도 대선 논공행상에 활용한 탓이기도 하다.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현 정부에서 올 7월까지 임명된 특임 공관장 63명 중 캠코더(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인사가 39명이나 된다.
내년에 50주년을 맞는 일본과 중국 외교에서 정점을 찍은 사건은 1992년 아키히토 전 일왕(日王)의 전무후무한 중국 방문이다. 그보다 20년 전 국교 정상화를 이끌어 낸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같은 실리주의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그는 한국 대선 정국의 블랙홀이 되어 버린 '대장동 의혹'을 떠올리게 하는 부동산 투기 사건으로 사임했지만 일은 할 줄 아는 정치가였다.
삼국이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뢰하는 파트너 관계로 나아가려면 다음 우리 대통령이 꼭 그의 말 한마디는 기억했으면 한다. "뛰어난 지도자는 인간을 호불호하지 않는다. 능력을 꿰뚫어 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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